“그가 죽음으로 뿌렸던 성경, 한국교회의 밀알”

국민일보

“그가 죽음으로 뿌렸던 성경, 한국교회의 밀알”

제너럴셔먼호 타고왔던 개신교 첫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5일 순교 150주년

입력 2016-09-02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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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프라이스는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150주년이 된 지금,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바라볼 때, 그가 전한 성경책과 그가 흘린 피가 귀한 한 알의 밀알이 됐다"고 말했다. 영국 웨일스 하노버 사택 앞의 스텔라(왼쪽)와 스티븐 프라이스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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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에서 군함으로 사용되다 무역선으로 팔린 제너럴셔먼호와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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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가 어린시절을 보낸 하노버 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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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교회에 있는 토마스 선교사 기념패. 로버트 토머스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선교사가 두 번째 조선전도여행에서 27세의 나이에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념패엔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욥17:11)란 성구가 씌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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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9월 14일 토마스가 묻힌 대동강변에 토마스 선교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토마스 선교사 기념예배당 앞의 한국인 장로들. 코리아닷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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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9월 4일. 달빛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제너럴셔먼호는 물이 빠져 나간 강의 진흙 바닥에 좌초됐다. 배에는 조선으로 두 번째 전도여행을 온 영국 웨일스 출신의 토마스 선교사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를 대대적으로 시작하고 있어 매우 위험했다. 다음 날인 9월 5일. 조선 관군들은 강가에 좌초된 제너럴셔먼호에 불을 놓았고,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모두 강으로 뛰어들었다. 토마스 선교사도 성경 한 권을 가슴에 품고 배에서 뛰어 내렸다. 뭍으로 헤엄쳐 나온 선원들은 모두 관군의 창에 목숨을 잃었다. 관군에 의해 끌려 나온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 백사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기도했다. 그는 가슴에 품고 있던 성경을 꺼내 관군에게 내밀었다. 병사는 주춤했으나 이내 토마스를 살해했다. 스물 일곱살의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왜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낯선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을까.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선교사. 그는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한국교회는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5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후암로 절제회관에서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추모기념예배’가 열리고, 12∼16일 영국 현지에서 웨일스 성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을 맞아 토마스 선교사의 전기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Chosen for Chosun)’(코리아닷컴)를 최근 국내에 출간한 역사학자 스텔라 프라이스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스텔라는 “전기를 쓰면서 한국 초기 교회가 감내했던 박해와 고난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낸 밑거름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선조들의 고난을 더 많이 이해하고 알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책은 외국인의 시각에서 1860년대의 세계정세와 조선의 현실 그리고 선교사역과 순교를 그리고 있다.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나와 남편은 영국 웨일스 출신으로 미국에서 30년간 살았다. 우리는 수년 전 고향을 찾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흘라노버에 있는 하노버교회를 방문했다. 이 교회에서 한국 지도와 토마스 선교사의 사진을 보았고, 머나먼 동양의 복음화를 위해 떠났다가 그곳에서 순교한 한 젊은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당시 미국 고든 칼리지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던 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리는 듯했다. 2007년 토마스 선교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하노버 사택을 매입해 남편과 그곳에서 살면서 전기 집필을 시작했다.”

스텔라 프라이스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했다. 런던대학교를 비롯해 윌리엄스 도서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프린스턴신학교, 예일대신학교 등을 방문했다. 특히 새뮤얼 오스틴 모펫 (마포삼열) 선교사의 아들 새뮤얼 휴 모펫 목사의 도움이 컸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의 한국 교회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토마스 선교사가 죽기 전까지 조선 땅에 뿌렸던 성경은 이후 많은 이들을 복음화시켰고,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미국과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조선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언더우드, 새뮤얼 오스틴 모펫 등의 선교사들이 조선 복음화를 위해 들어왔고, 이후 교회가 세워지고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무모하리만치 뜨거운 열정이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뿌려지게 됐고, 그로 인해 조선의 수많은 성도들은 전 세계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평양 대부흥의 역사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



-왜 그는 낯선 나라에 와서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

“그것은 ‘부름심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는 1년 전 조선으로 전도여행을 와 2개월간 서해안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66년 9월 두 번째 전도여행 중이었다. 토마스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헌신은 미미해 보였을지 몰라도 그가 떠난 후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가 순교한지 150주년이 된 지금,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바라볼 때, 그가 전한 성경책과 그가 흘린 피가 귀한 한 알의 밀알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를 통해 성경을 반포했다. 조선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게 된 것은 토마스의 두 번째 전도여행 이후에 가능했다.”



-전기 집필 후 달라진 삶이 있다면.

“97년 콩고내전 지역에 단기선교사로 봉사했던 남편은 누가복음 24장 말씀에 근거해 ‘엠마오 길 사역(Emmaus Road Ministries)’을 설립, 재난 구호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북한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편은 의료 선교 차원에서 그동안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해 북한 의사들에게 선진의료 기술을 소개했다.”

스텔라 프라이스는 현재 한국의 목사님들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오는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미국에서 인정받는 의사였던 남편 스티븐 프라이스는 토마스 선교사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과 북한에 의료 선교를 가게 되었고, 이후 북한 선교와 세계 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무엇이 당신들을 변화시킨 것인가.

“나는 한국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무서운 고통을 알게 되었다. 전쟁과 기근, 질병 한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이 모든 것을 통과했다. 지금 남과 북으로 나뉘어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는 말씀을 좋아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알지 못하던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

-하노버 사택은 어떤 곳인가.

“하노버 사택은 토마스 선교사의 부모님이 37년간 목회를 하고 은퇴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토마스 선교사 가족들이 식사를 했던 그 부엌에서 우리는 식사를 하고, 토마스의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며 기도하던 작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 토마스 목사는 아들이 평양에서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이 부엌에서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엔 10여명의 한국 청년들이 우리 집 마당을 거닐며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또 60여명의 웨일스인과 한국인들이 함께 모여 하노버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모든 것은 조선에 건너가 복음을 전파했던 토마스 선교사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교회에 전하고 싶은 말은.

“한국 초기 교회의 성도들은 일제 지배 하에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모진 고문과 때로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 순교까지도 감내해야 했다. 해방 후에도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로 자신의 동포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던 기독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하나님을 향한 이들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용서하며 감싸주었다.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선조들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라고 말하고 싶다. 나아가 해외에 나간 선교사들은 그들이 섬기는 나라의 역사와 고난을 더 이해하길 바란다.”

■토마스 선교사가 떠난 후…

"저는 10월(1893년)에 22명의 교리문답 수강생을 모집했고 더 체계적인 양육을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나온 토마스 선교사에게 한문 신약성경을 받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1925년 3월 마포삼열 선교사의 선교보고 중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배에서 뿌린 성경을 주운 사람은 정부 관원을 포함해 상당수에 달했다. 당시 20세였던 이신행이라는 여인도 성경 한권을 얻어 집으로 왔는데 그후 그녀는 평양 최초의 여자교인이 됐다. 그녀의 아들 이덕환도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시무했다. 제너럴셔먼호를 구경하러 대동강변으로 나온 11세 소년 최치량도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 세권을 얻어 돌아왔다. 당시 영문주사로 있던 박영식은 성경책의 종이 질이 좋아 버리기 아까워 한 장 한 장 뜯어 집의 벽지로 발랐다.

1891년 소년이었던 최치량은 성인이된 후 널다리골에 있는 박영식의 집을 매입해 여관을 경영하게 됐다. 그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새뮤얼 오스틴 모펫(마포삼열) 선교사와 한석진 목사가 우연히 이 여관에 머물게 됐다. 이들은 온통 성경 말씀으로 도배된 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모펫 선교사는 이 여관주인 최치량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박영식도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었다. 결국 널다리골의 그 여관은 예배의 처소로 사용됐는데 나중에 이곳이 평양 최초의 개신교회인 널다리골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는 후에 장대현교회가 되어 이곳에서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하면 평양 대동문 안에서 교회를 열었을 때 토마스에게 받은 성경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아들인 새뮤엘 휴 모펫은 1973년 5월 6일자 '코리아헤럴드'에 이렇게 기록했다.

"제 아버지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24년 후에 평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들이 증언하기를 한 백인이 불에 타고 있던 갑판의 연기 속에서 "예수"라고 외치며 강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던져 주었다고 합니다."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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