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한국 최초 ‘귀신통’ 피아노… 찬양 소리, 조선에 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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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한국 최초 ‘귀신통’ 피아노… 찬양 소리, 조선에 퍼지다

대구 달성 사문진 피아노와 사보담 선교사

입력 2017-10-1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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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역 제5대 선교사 리처드 헨리 사이드보담(한국명 사보담·오른쪽)과 에피 엘든 브라이스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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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달성 100대의 피아노’ 축제가 지난 9월 30일과 10월 1일 양일간 대구 달성군 화원동산(옛 사문진나루터)에서 열렸다. 올해 7회째를 맞은 이 축제는 1900년 미국 선교사 사보담 부부가 전도를 위해 한국에 처음 피아노를 들인 것을 기념하는 음악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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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첫 교회 대구제일교회. 사보담 선교사 부부의 사역지였다. 지금은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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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찍은 사문진나루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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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영남제일관. 경상감영 남문으로도 불렸으며 지금의 약전골목 근처이다. 사보담의 피아노 운반은 남문을 거쳐 시장통을 지나는 데 애를 먹었다. 현재 남문은 대구 망우공원에 복원되어 있다. 오른쪽 사진은 옛 남문 터 표식이다(위 사진). 19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피아노 운반 장면. 당시 부산 전킨병원 앞에서 찍은 것이다. 오른쪽은 사보담이 그린 운반대 스케치(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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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년이 됐다. 한국에 피아노가 들어온 지 말이다. 피아노를 처음 접한 당시 사람들은 ‘귀신통’이라 불렀다. 육중한 피아노를 상여 막대를 이용해 옮기는 과정서 붙여진 이름이다.

피아노 없는 한국교회를 상상할 수 없다. 상가건물 지하 개척교회라도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쯤은 있다. 개척교회 사모는 반주자이기도 하다. 피아노 음악 없는 찬송은 어딘가 허전하다. 하나님이 흠향하지 않을 것 같은 조바심이 든다.

상식적으로 한국에 피아노가 유입된 것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 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1885년 기독교 전래 이후 전도 활동을 위해 피아노를 들여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마차 길도 제대로 없는 조선에 그 육중한 피아노는 어떤 방식으로 유입됐을까.

낙동강 짐배 통해 대구 도착한 피아노

대구 달성군 사문진나루터(현 화원동산)는 우리나라 첫 피아노가 유입된 곳이다. 손태룡 한국음악문헌학회 대표(안동대 초빙교수)가 대구지역 제5대 선교사 리처드 헨리 사이드보담(1874∼1908·한국명 사보담)과 에피 엘든 브라이스(1876∼1942) 부부의 삶을 추적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피아노를 반입한 사실을 밝혀냈다. 1990년대 연구 결과다.

이를 근거로 2011년부터 달성군과 달성문화재단이 ‘달성 100대 피아노’ 축제를 매년 열었다. 1900년 3월 미국 미시간주에서 배송된 사보담 부부의 이삿짐 속 피아노가 부산 낙동강 하구에서 짐배를 통해 대구 근처 사문진나루터에 도착한 것을 기념한 축제다.

달성군은 사문진나루터에 야외공연장을 건립하고 피아니스트 100명을 초청해 매년 음악회를 갖는다. 지난 9월 30일과 10월 1일에도 100인의 피아니스트가 뉴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피아노 콘체르토 옴니버스 등 다양한 곡을 수놓았다. 지휘자 금난새, 바리톤 김동규, 소프라노 마혜선,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와 김기영 최영민 등이 출연했다. 아쉽게 찬양곡은 없었다.

음악회가 열리는 낙동강은 석양과 어우러져 강변 정취를 물씬 풍겼다. 파이고 오염된 낙동강 줄기의 상처는 석양 그늘에 감춰졌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사보담 선교사 부부를 위한 헌정음악처럼 들렸다.

그 사문진나루터는 대구 첫 교회였던 대구제일교회기독교역사관(당시 남문안교회당)에서 40리(16㎞)길이다. 자동차로 30분쯤 걸린다. 한데 당시 이 거리를 두고 3일 걸려 피아노를 운반해야 했다. 논길과 보리밭길을 지나야 했고 개울을 건너야 했다. 남문시장통에 들어서는 차일을 걷어내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됐다. 이 ‘신비한 문명’은 하나님 말씀을 빛내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 위해 그 먼 땅에서 기도로서 출발했다.

사보담은 영국 런던 북부 비글스웨이드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목사인 아버지 윌리엄은 1883년 가족과 함께 미국 미시간주 레이크시티에 이주, 북장로교 목사로 활동했다. 사보담은 1890년대 후반 미시간 알마대학과 뉴저지 프린스턴신학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프린스턴대학은 매코믹신학교와 함께 미 북장로교가 그 학교 출신을 한국에 파송한 대표적 학교다. 북장로교 부산선교지부를 개척한 베어드 선교사가 매코믹신학교 출신이다.

사보담은 1899년 5월 미시간주 새기노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달 미시간주 래피어에 사는 에피와 결혼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장로교 목사였다. 에피는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고 마을에서 피아노를 지도하며 생활했다.

그해 9월 6일, 부부는 조선이라는 나라 대구선교지부 선교사로 발령받았다. 불과 스물다섯과 스물셋의 새내기 부부는 9월 28일 미시간 래피어 집을 떠나 머나먼 전도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호놀룰루, 일본 요코하마 고베 히로시마를 거쳐 11월 20일 오전 9시 부산에 도착했다. 도착한 그날 부부는 의료선교사 어빈(1862∼1933) 집에 들렀다. 그리고 조랑말을 타고 대구로 향했고 사흘 후 당도했다. 부부는 먼저 부임한 3대 대구선교사 존슨(1869∼1951) 부부 집에서 2개월간 같이 살며 그해 크리스마스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정은 에피가 일기로 상세히 남겼다.

한국에 처음 피아노가 유입된 과정은 사보담이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1900년 3월 편지 내용에서 확인된다. 사보담은 이 편지에서 부산 사하의 낙동강 하구를 통해 짐배로 거슬러 올라온 피아노를 사문진나루터에서 하역해 대구 동산 자신의 초가집까지 어떻게 옮겼는지를 3월 26∼28일자 일지로 기록했다.

앞서 사보담은 1899년 12월 29일 일지에 초가 처소 내부 구조도를 그려 피아노 설치 위치를 미리 잡아놓았다. 그 기록에는 ‘…모든 문이 낮아 서서 드나들 수가 없다. 피아노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딱 한 군데 있는데… 왜 피아노를 (들여) 놓을 창문이나 벽면 단 5피트(약 150㎝)도 없는 걸까. 아 이 멋진 한국식 집이여!’라고 탄식하기도 한다.

상여 들 듯 옮겨진 ‘귀신통’ 피아노

1890년대 영남지역 복음 전파를 위해 부임한 선교사들의 운송 수단은 낙동강 줄기를 이용한 짐배였다. 주로 미국과 호주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한 부산과 대구를 선교 거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도시와 영남 내륙의 화물은 낙동강 짐배에 의존했다. 박호만 향토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1889년 부산에서 설립된 일본 기선회사 증기선이 부산-밀양 간을 운항했고 밀양서부터 사문진까지는 폭이 좁은 평저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따라서 1880년 제작된 사보담 부부의 ‘미국식 피아노’는 평저선으로 운송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식 피아노’는 지금의 업라이트보다 크고 묵직하다.

사보담은 1900년 3월 사문진에 피아노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깔개, 로프, 망치 등을 가지고 인부 20여명과 함께 걸어서 사문진으로 갔다.

‘사문에 도착하자 피아노는 강변에 있었다. 배에서 내리려면 엄청난 고생을 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매우 감사했다. 그때까지 피아노가 물에 묻지 않도록 잘 보관돼 있었다.… 짐꾼들은 새끼줄을 만들었는데 두께 2인치(5㎝), 길이 50피트(15m)짜리 3개였다. 우리가 가져온 길이 14피트(420㎝)짜리 상여용 막대 2개를 가져와 피아노 양옆으로 땅에서 1피트(30㎝) 높이로 위치시켰다. 그리고 가로막대 5개를 새끼줄로 고정시켜 견고한 운반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폭 330㎝ 운반대 위에 피아노를 올려 대구까지 가져갔다. ‘주변 집들에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고’ ‘보리밭 위를 쿵쾅거리며 지났고’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구덩이나 도랑, 연못을 건넜고’ ‘진창 논을 잘 피해야 했으며’ ‘상점들의 물건을 넘어뜨리기도’ 하며 3일 만에 대구 동산 초가 사택에 닿았다. 한데 피아노가 방안에 들어가지 않아 결국 문틀을 뜯어내야 했다.

대장정을 마친 피아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제자리에 있는 건반이 하나도 없었다. ‘저는 (건반) 조각들을 모아 조립법을 연구했는데 딱 두 건반만 망가져 있었죠. 드디어 첫 피아노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습니다. 피아노 조율은 아주 잘되었고, 저희는 아주 즐겁게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에요.’

사문진 피아노 축제의 아쉬움

부부는 피아노가 도착하자 어린이 성경공부방을 열고 피아노 반주로 찬송했다. 아이들이 구름 떼처럼 몰렸다. 그 1900∼1910년 무렵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운 사람은 조선에서 에피와 존슨의 아내 파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파커는 1901년 미국에서 피아노를 들여와 피아노 교육을 시작했다.

사보담 부부는 1900년 11월 부산선교지부로 부임하면서 처음 피아노를 가져갔다. 부산 전킨기념병원 앞을 지나는 운반 사진과 1903년 사보담 부부 부산 집 거실 사진에서 피아노를 확인할 수 있다.

“사보담 부부의 전도활동으로 시작된 피아노 유입은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을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교회음악의 뿌리와 다를 바 없는 ‘사문진과 한국 첫 피아노’를 기렸으면 합니다.” 손태룡 대표의 말이다.

‘2017 달성 100대 피아노’ 축제는 수만명이 몰린 가운데 성대히 끝났다. 그런데 음악은 있으나 찬양이 없어 그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한국교계가 주최 측과 협력하여 ‘찬양을 위한 피아노’의 의미를 살리면 어떨까 싶었다.

피아노 연주자 사보담 아내 에피 왜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나

사보담 부부는 한국에 처음 들여온 피아노로 어린이 성경공부방을 열어 전도에 힘썼다. 무엇보다 전공자 에피의 열정이 아니었으면 그 멀리 미시간에서 대구까지 피아노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에피는 대구에서 출산 후유증과 지병에 시달리다 환경이 좋은 부산으로 옮겨 1901∼1907년 사역했다. 이 기간 내내 반주와 전도, 피아노 교육에 힘썼다. 부부는 부산 초량교회, 제일영도교회, 항서교회 등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리고 1907년 안식년을 맞아 선교기금 모금 등을 겸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사보담이 집 안에서 가스폭발 사고를 당해 숨지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한국 교인들과 작별한 부부였다.

2009년 사보담의 외손녀와 친손녀 등이 그 약속을 지켰다. 사보담 부부의 유품 등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와 부산근대역사관에서 ‘사보담의 100년의 약속’ 특별전을 연바 있다.

한편 에피는 남편이 소천한 후 소녀주일학교 교사로 15년을 일했으며 교사 은퇴 후에도 교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 연주자로 봉사했다.

대구·부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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