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⑫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上)

[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⑫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上)

“만일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 위해 바치리라”

입력 2018-04-2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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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90명, 선교사 가족 55명이 안장된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전경. 미국 영국 캐나다 등 6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는 장로교가 36명으로 가장 많고 감리교가 25명으로 그 뒤를 잇는다. 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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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레이첼 켄드릭 선교사와 묘비 모습. “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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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완 충북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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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 숙소를 나와 광명을 거쳐 안양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벚꽃 잎이 길 위에 떨어져 꽃길로 변했다. 순례길 마지막을 축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한강이 나왔다. 1.1㎞ 길이의 양화대교를 건너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도착했다. 전남 여수 애양원을 출발한 지 27일 만이다.

아, 양화진…축복의 꽃길을 걸으며

양화진(楊花津)은 노량진 동작진 한강진 송파진과 함께 ‘서울의 5진’으로 불리던 주요 나루터다. 인천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해상 통로의 전진기지로서 서울의 관문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이곳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한국에 들어오는 길목이었고, 서울에 머물다가 선교여행이나 선교지로 떠나는 출발지였다.

양화진은 천주교 박해와도 관련돼 있다.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모진 박해가 있자 프랑스는 1866년(고종 3년) 군함을 파견하고 양화진에 들어와 군사 활동을 했다. 외국의 군함이 왕실 코앞까지 들어왔지만 그것을 물리치지 못한 것을 치욕으로 여긴 대원군은 무장 군인을 배치해 그해 10월 다시 강화도에 온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머물던 자리를 한강물로 씻어내기도 아깝다. 오랑캐를 끌어들인 천주교도의 피로 깨끗이 씻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곳에서 1만여명의 천주교 신도의 목을 베고 한강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양화진 근처 봉우리가 ‘사람의 목을 자른다’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이란 끔찍한 이름이 붙게 됐다.

선교사묘원 자리는 원래 외국인 선교사들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1890년 7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이자 고종의 시의, 광혜원 2대 원장으로 있던 존 헤론(1856∼1890)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헤론은 개척선교사로 조선 말 성경번역작업과 전염병 예방에 힘쓰던 중 시골 환자를 치료하다가 자신도 감염돼 안타깝게도 34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미국 공사관은 조영수호통상조약을 근거로 한양 인근에 묏자리를 제공해 달라고 조선정부에 요구했다. 조영수호통상조약에는 ‘외국인이 통상지역 안에서 사망할 경우 조선정부는 적당한 장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그 관리를 외국인 단체에 맡긴다’는 조항이 있었다.

당시 도성 안에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그렇다고 무더운 여름철에 인천 제물포항 해안 언덕에 있는 외국인 묘지까지 시신을 운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찾은 곳이 양화진 근방의 빈터였다. 헤론이 양화진에 묻히게 되면서부터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의 묘비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게 주셨다”고 기록돼 있다.

생명을 바친 선교 앞에 저절로 숙연해져

이때를 기점으로 2005년까지 총 15개국 417명의 외국인이 양화진에 안장됐다. 이 중 선교사는 90명(남자 36명, 여자 54명), 선교사 가족은 55명이며, 나머지 272명은 비선교사다. 선교사는 장로교가 36명으로 가장 많고 감리교 25명, 성공회 8명, 구세군 8명, 캐나다연합교회 4명, 군소교단 8명이다. 국적별로는 총 6개국으로 미국 66명, 영국 10명, 캐나다 9명, 스웨덴 3명, 남아프리카공화국 1명, 일본 1명이다.

비선교사라 하더라도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영국인 어네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독일인 에케르트(1852∼1916), 우리나라 근대 사법제도 수립에 기여한 그레이트하우스(1846∼1899) 등이 안장돼 있다.

1984년까지 쓰레기와 잡초가 무성했던 이곳을 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중심이 돼 기념관 설립과 기념사업을 추진했고, 2006년 현재의 명칭이 부여됐다. 2005년부터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이재철 목사)가 1만3224㎡(4000평) 묘원관리 및 안내, 기념관 운영 등을 책임지고 있다.

선교사묘원은 A구역부터 I구역까지 9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묘지와 비석, 주요 선교사들의 소개글을 게시해 놨다. 묘원에 들어서면 왼쪽엔 공주 영명학교 등에서 가르치며 선교와 계몽활동에 힘썼던 찰스 A 사워(1891∼1972) 선교사와 아내 마거릿(1896∼1981), 아들 로버트 G 사워(1925∼1995)의 묘비가, 오른쪽엔 영국 출신 언론인으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베델의 묘가 있다.

이국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선교사들의 헌신적 삶은 140여개의 묘비에 축약돼 있었다. 100여년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비석과 흐릿한 글씨를 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짤막한 묘비 문구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목적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줬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나는 다시 일어나 나의 하나님께 돌아가리라.” “그리스도인, 어머니, 선교사, 모두의 벗.”

켄드릭 선교사 강렬한 묘비 문구

특히 루비 레이첼 켄드릭(1883∼1908) 선교사의 묘비 문구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렬했다. “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켄드릭은 1907년 9월 엡윗청년회의 후원을 받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해 개성 여학교에서 기도회를 인도하고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자신의 선교사역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평소 동료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나의 사역이 너무 짧게 끝나면 나는 보다 많은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이곳에 와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처녀 선교사였던 켄드릭은 안타깝게도 한국에 온 지 9개월 만인 1908년 6월 급성맹장염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의 장례예배에서 와슨 선교사는 이렇게 설교했다고 한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오히려 감사하고 더 큰 뜻을 바라봅시다.” 켄드릭 선교사의 별세 후 그녀를 파송한 텍사스 엡윗청년회는 12만 달러를 모아 켄드릭추모기금을 조성했고, 숭고한 선교 모범에 따라 다수의 청년들이 선교사로 자원했다.

선교사묘원에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128명이 묻혀 있다. 그중 선교사 자녀가 47명이다. 성인들의 경우도 여선교사가 남선교사보다 많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는 조선 땅에서 선교사역이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가늠케 한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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