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시편으로 성질부리기

국민일보

[시온의 소리] 시편으로 성질부리기

입력 2018-11-2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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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내 원수가 별 일 아닌 일로 집까지 쳐들어와 어린 아들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비난하는 통에 견딜 수 없었다. 밤늦은 시각 교회로 달려가 강대상 뒤쪽, 십자가 아래에 무릎 꿇고 통곡했다. 너무 힘들다고, 더는 못하겠다고, 나를 불렀으면 책임져야지 책임지지 못할 일을 왜 하셨느냐고. 저 사람, 내가 어쩌지 못하니 당신이 어떻게 해 달라고, 아니면 내가 죽는다고.

저 기도에는 내 입으로 차마 발설하지 못한 무수한 말들이 숨어 있다. 그 말을 못한 나는 바보였다. 당한 것도 힘든데 말도 못하다니. 하나님 아니면 누가 들어주고, 하나님 아니면 누구에게 말할까. 그날 이후, 나는 내 가슴 속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분노와 욕설을 푸는 법을 구했다.

답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었다. 장 칼뱅이 ‘영혼의 해부학’이라고 일컬었던 시편이 답이었다. 이름 하여, 시편으로 성질부리기, 혹은 거룩하게 지랄하기이다. 간단하다. 시편을 읽는 거다. 읽기만 하면 된다. 시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본다. 맘에 들고, 눈에 띄는 구절에 표시한다. 화날 때, 힘들 때, 외로울 때, 욕하고 싶을 때 등등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들 때면, 내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시편을 마구 읽는다. 그러면 속이 확 풀린다.

모든 시편이 좋지만 탄식 시편이 제격이고 그중에 제일은 복수 시편이다. 탄식 시편은 총 150편 중 대개 53개로 본다. 무려 3분의 1이다. 그 시편 중에 복수시 또는 저주시도 제법 많다. 그 시편을 찾아 읽는 거다. 저주 시편을 찾기 어려워할 독자들을 위해 일러준다. 35 58 59 60 70 109 137 140편이다. 시편 구석구석에 복수를 간청하는 구절이 상당하고 성경 곳곳에 널려있으니 통독하다가 표시해놓고 나중에 활용한다.

그 시편 여백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시하라. 이 구절은 미운 시댁 식구, 이 시편은 남편 또는 아내와 자식, 저 시편은 직장의 상사나 부하, 거래처 직원과 친구 동료 등등. 그 인간 땜에 속이 부글부글 들끓을 때 펼쳐 크게 읽는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주야장천 읊조린다. 누군가 뭐하냐고 물으면 “응, 성경 읽어” 하면 된다. 영적이지 않은가. 이 얼마나 거룩한가.

그러나 반론이 만만치 않다. 어떻게 성경으로 저주할 수 있단 말인가. 버나드 앤더슨은 시편 연구서에서 저주 시편 중 일부는 공중예배에서 이용하기 어렵다고 한다. 산상수훈과 달리 수준 낮은 하위 언어(sub-language)란다. 그의 말이 십분 이해된다. 그가 지목한 109편을 읽어보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다지도 심한 저주가 시편에, 성경에 있다니.

나는 활용해도 되고 거룩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생각해보자. 이 저주 시편은 성경, 정경(Canon)이 아니던가. 무릇 정경이라 함은 신자의 생활 기준이요 척도를 뜻한다. 우리 더러 그렇게 하라는 거다. 시편은 하나님의 탄식이요 복수요 저주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 사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탄식 시편 대부분을 다윗이 썼다는 것이다. 복수 시편 읽기는 다윗의 이야기에 참여하기이며 그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 다윗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저주를 기도 시간에 쏟아내지 않았다면 그는 사울처럼 자신의 원수를 향해 창을 던지거나 결국 미쳐서 죽어버렸을 것이다. 사울처럼 창을 던지거나 다윗처럼 시편으로 욕하거나, 누구의 길을 따를지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다윗을 따르겠노라.(수 24:15)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각 종교에 따라 자살률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다. “개신교는 어느 곳에서나 예외 없이 다른 종교보다 훨씬 많은 자살자가 나온다.”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의 자살 비율이 더 높은 이유는 무얼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속이기 때문에, 표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나를 살리기 위해 저주 시편을 주야장천 읽겠다는데 왜 안 되는 것인가.

미치지 않고, 죽이지도, 스스로 죽지도 않은 비결은 내 나름 그나마 거룩하게 지랄을 떨었기 때문이다. 내게 한스러운 것은 좀 더 많이 복수 시편을 읽지 않은 거다. 그랬더라면 내 자신에게, 가족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성질을 훨씬 적게 부렸을 것인데 말이다.

복수 시편이 필요 없는 인생이 있다면 더 없이 복되지만 하늘은 우리 인생에게 그런 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생에는 원수가 있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이 필연이고 그것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미치거나 죽을 텐데, 어떤가, 시편으로 성질부리기를 해 보는 것은.

김기현 (로고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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