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마강래] 힘 뺀 지식 속에 피어나는 창조적 아이디어

[혜윰노트-마강래] 힘 뺀 지식 속에 피어나는 창조적 아이디어

자연스러움은 감성과 이성의 결합을 용이하게 만들고 직관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어

입력 2019-06-14 04:01

영국의 펍(pub)은 맥주뿐만 아니라 햄버거, 스테이크 등 음식도 파는 대중적인 술집이다. 이런 술집의 외벽에 유명한 철학자나 과학자가 단골고객이었음을 자랑하는 블루플라크(blue plaque)란 파란 명판이 붙은 곳이 꽤 있다. 1953년 케임브리지에서의 일이다. 프란시스 크릭이란 한 청년이 “생명의 신비를 찾았어! 왓슨과 함께 찾았다고!”를 연발하며 ‘디 이글(The Eagle)’이란 펍으로 뛰어 들어갔다. 크릭과 왓슨이 발견한 생명의 신비는 이중 나선구조로 이루어진 DNA였다.

생물학에서 20세기 최대의 성과로 간주되는 이 발견은 이렇게 술집에서 최초로 발표됐고, 이 술집에는 이를 기념하는 블루 플라크가 붙어 있다. 왜 흥분한 크릭이 펍으로 뛰어들었을까? 이들에겐 점심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DNA구조에 대해 토론을 벌인 술집이 바로 또 다른 연구실이었기 때문이다.

DNA 구조를 발견한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이와 유사한 경험이 있긴 하다. 유학생 시절 나의 런던 생활은 경제적 압박과의 싸움이었다. 빨리 학위를 마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지금도 누군가가 런던에서 어디를 가는 게 좋겠는지에 대해 물으면 멈칫거리거나 우물쭈물한다. 집과 연구실만 왔다갔다했으니 아는 곳이 별로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연구실 동료들이 무료한 학교생활을 견디게 해줬다는 점이다. 마음이 조급했던 나는 이들을 피하기도 했다. 더딘 진도에 읽어야 할 논문은 쌓여가는데, 틈만 나면 교내 커피숍에 가자고 하는 거다.

경험했던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유럽친구들은 한번 커피숍에 자리 잡으면 당최 일어나질 않는다. 거절도 한두 번이지, 마냥 사양할 수만은 없었다. 물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다는 언제나 즐거웠다. 고향 친구와의 에피소드, 어릴 적 놀이, 어제 갔던 식당, 방학계획 등 대화 소재는 끝이 없을 듯했다. 하지만 대화는 깔때기처럼 서로 골머리를 앓던 연구주제로 이어졌다.

이 때 참으로 잘 활용됐던 게 있다. 바로 ‘냅킨’이다. 각자는 테이블 위에 뻣뻣한 갈색 냅킨을 펼쳐 놓고 이런 저런 설명을 이어갔다. 사각의 종이공간은 금세 온갖 낙서와 그림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카페는 또 하나의 연구실을 제공했고, 각자는 자신의 냅킨을 고깃고깃해서 앞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떴다. 냅킨에 적힌 아이디어들은 컴퓨터 속에서 보다 정돈된 형태의 파일로 옮겨졌을 것이다. 이런 ‘수다왕’들 중 셋은 런던대 교수가 됐다. 나머지도 유럽 유수대학의 연구자가 됐다.

내가 생각했던 연구자들의 모습은, 논문 더미로 가득한 책상 앞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밤을 새는 이들이었고, 실제 나도 그런 모습의 연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깜짝 놀랄 만한 연구 성과는 엄숙함의 아우라 속에서 피는 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고립된 공간이 아닌 칸막이 없는 자유로운 환경, 편안한 상대와의 대화 속에서 피어오른다. 이를 알아챈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의 IT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놀이터 환경을 제공하며 혁신을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에서 얘기한 것처럼 인간은 원래 유희의 존재고, 더 잘 노는 인간이 더욱 창의적일 수 있는 것이다.

뭐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금까지도 연구에 대한 나의 태도는 그리 많이 바뀌지는 않았다. 내 주변은 딱딱하고 진지하며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책상 앞에 앉아 양미간을 찌푸리며 얻은 성과보다 더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게 있었다. 바로 ‘힘을 뺀 상태’, 그러니까 인위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온 연구결과다. 자연스러움은 감성과 이성의 결합을 용이하게 만들고 직관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카페 귀퉁이에 앉아 반나절 내내 최근 진행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해 수다를 떨며 이런 힘 뺀 지식의 힘을 다시 한번 느꼈다. 나와 다른 분야를 공부하지만 사회과학에 조예가 깊은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번개와 섬광이 번쩍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감이 충만한 마음으로 돌아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자유로운 공간,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 열정을 가진 사람과 함께할 때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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