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안 예쁘고 안 착한 여가수 시대

국민일보

[데스크시각] 안 예쁘고 안 착한 여가수 시대

권혜숙 문화부장

입력 2020-01-30 04:05
지난해 5월 발매된 리조의 3집 앨범 ‘Cuz I Love You’. 앨범 커버에 자신의 누드 사진을 넣었다. 2013년 데뷔했지만 뒤늦게 빛을 본 중고 신인이다.

하마터면 “언니!”라고 환호할 뻔했다. 지난 27일 아침, 방탄소년단이 한국 가수 최초로 그래미 어워즈에서 공연하는 장면을 보려고 TV를 켰다가 시상식 첫 무대를 장식한 흑인 여가수 리조에게 반해버렸다. 오케스트라에 밀리지 않는 폭발적인 성량으로 열창하면서도 댄서들과 신나게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화려한 기교의 플루트 연주까지. 분위기를 단숨에 달아오르게 한 무대는 압도적인 에너지를 뿜어냈다. 나보다 어려도, 멋있으면 언니인 거다.

이날 열린 제62회 그래미 어워즈는 슈퍼 여성 신인 리조와 빌리 아일리시의 맞대결로 화제를 모았다. 대중음악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권위 있는 그래미상 중에서도 노른자위 격이 올해의 앨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신인 이렇게 4개 부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올해 나란히 이 부문 모두에 후보로 올랐다. 여성 신인 두 명이 본상 4개 부문에서 격돌한 건 그래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과는 트로피 4개를 싹쓸이한 빌리 아일리시의 압승이었지만 시상식 공연은 리조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었다. 라이벌 구도로 같이 묶였어도 사실 빌리 아일리시와 리조는 추구하는 음악 장르, 성장 배경, 인종, 나이, 어느 하나 접점이 없다. 빌리 아일리시는 트렌디한 일렉트로닉 중심의 음악을 하고, 홈스쿨링으로 작곡을 배운 18세의 백인이며, 리조는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한 32세 흑인으로 힙합과 R&B를 한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직접 곡을 쓰는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것과, 무엇보다 예쁜 척도 착한 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리 아일리시의 데뷔 앨범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의 재킷 사진. 예쁘게 보이는 데는 전혀 관심 없는 듯, 흰자위만 보이며 웃고 있는 사진이 어딘가 기괴하다.

빌리 아일리시는 히트곡 ‘배드 가이(Bad Guy)’에서 ‘네가 상남자라고? 난 나쁜 여자야, 내가 못된 짓은 꽤 잘하거든’이라고 노래하고, 리조는 ‘트루스 허츠(Truth Hurts)’에서 ‘DNA 테스트를 받았더니 난 100% 나쁜 X이래’라며 대놓고 나쁜 여자를 자처한다.

이들은 또 정형화된 미의 기준을 거부한다. 빌리 아일리시는 항상 펑퍼짐한 티셔츠에 통 넓은 바지를 입는데, 자신의 외모에 심한 결점이 있다고 여기는 신체이형장애라는 질환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헐렁한 옷을 입으면 ‘엉덩이가 어떠네’하는 식으로 몸매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며 자신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키 178㎝에 100㎏이 넘는 리조는 더 특별하다. 한국에서라면 무시무시한 댓글이 달리지 않을까 싶은 체구지만, 앨범 커버에 자신의 누드 사진을 넣을 만큼 당당하다. 그래서 단번에 ‘보디 포지티브(Body Positive·자기 몸 긍정주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혁명적”이라는 그는 “나는 정치적인 아티스트도 아니고 용감한 것도 아니다. 내가 음악을 하는 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나 스스로 자기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내 메시지가 뚱뚱한 흑인 여성들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며 피부색, 성별,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과 차별을 단숨에 뛰어넘어버린다.

이번 그래미 시상식이 여성 팝스타에 대한 기존 이미지가 전복되는 새로운 시대를 알린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간 총 10개의 트로피를 가져간 테일러 스위프트가 올해 무관에 그친 것도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지금도 이론의 여지 없는 최정상의 가수지만 금발에 투명한 피부, 바비 인형 같은 체형의 테일러 스위프트는 ‘여성 스타란 이런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예쁘장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어필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새해 결심이 살빼기였고,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작심삼일에 그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 중이라면, 동지여, 어떠신지. 어차피 전지현과 권상우처럼 될 수 없는 몸, 리조의 기를 받아 보디 포지티브에 동참하심이. 대신 나의 몸을 긍정하는 만큼, 다른 이들의 몸을 존중하는 의미로 ‘얼평’(얼굴 평가)과 ‘몸평’(몸매 평가)의 유혹도 함께 이겨냅시다.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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