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50대 음주운전자와 유학생의 죽음

국민일보

[돋을새김] 50대 음주운전자와 유학생의 죽음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입력 2020-12-15 04:04 수정 2020-12-15 04:04

28세 대만 유학생 쩡이린씨는 지난달 6일 서울 강남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초록불로 바뀐 횡단보도를 건너던 그녀를 풀스피드의 차량이 들이받았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그의 사연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50대 남성이라는 것, 당시 혈중알코올농도가 0.08% 면허취소 수준이었으며, 음주운전 전력이 있다는 정도만 전해진다.

쩡이린씨 부모는 다음 날 대만에서 소식을 들었다. 교수와 만나고 있다던 딸은 마지막 통화 후 몇 시간 만에 숨이 끊어졌다. 부모는 한국에 와서 병원에 안치된 외동딸의 시신을 봤다. 장례를 마친 그녀의 어머니는 대만에 돌아가 편지를 보냈다. 가늠하기 어려운 비통함과 절망을 한 자씩 꾹꾹 눌러쓴 글이었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얼음장처럼 차갑고 피에 뒤덮인 딸을 안았다.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딸을 관에 넣고 화장터로 보내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며 “그녀는 유망한 앞날과 아름다운 나날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녀가 없어지고 우리도 살아갈 희망을 잃었다. 우리는 살인자의 잔인함 때문에 살아갈 모든 목표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깨지고 부서졌다”고 적었다. 또 “딸아이가 차에 치였을 때 얼마나, 얼마나 아팠을까. 그것을 생각할 때면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썼다.

편지를 읽으며 딸을 잃은 엄마 앞에 남겨진 날들을 상상했다. 딸이 없는 하루, 딸이 없는 또 다른 하루, 다시 딸이 없는 하루 그리고 딸이 없는 그다음 하루. 돌아올 수 없는 딸을 기다리는 그 많은 하루들. 그걸 세어보다 생각했다. 그날 강남 복판에서 숨을 거둔 건 쩡이린씨 한 사람이었을까. 그녀의 부모가 말한 “경솔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음주운전자”가 살해한 게 그들의 딸 한 명이었을까.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생명이 끊어지는 한 건의 비극으로 멈추는 걸까.

우리 모두 한 사람 앞에서만 짓는 표정을 갖고 있다. 그 사람을 바라볼 때만 움직이는 얼굴 근육이 존재하고, 그 사람과 대화할 때만 튀어나오는 말투와 몸짓이 있다. 뉴런의 어떤 연결고리는 오직 그 사람과 소통할 때만 반짝인다. 우리는 그런 특별한 패턴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분인(分人)들로 살아간다. 오래 알고,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와의 분인은 커진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을 빌리자면 개인의 인격 자체가 타자와 협업해 만든 분인의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명을 죽이는 건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나란 무엇인가’) 행위다. 쩡이린씨를 살해한 음주운전자는 딸과 함께할 때만 존재하는 노부부의 분인을 동시에 죽였다. 그녀를 바라볼 때 번지는 부모의 미소를 죽였고, 그녀와 대화할 때만 켜지는 기억의 회로도 꺼버렸다. 노부부는 살아있지만 부모로서 그들의 분인은 죽었다. 깨지고 부서졌다. 상처는 아물지만 죽은 건 살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는 건 “언제나 연쇄살인”(신형철의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죽음을 세는 법을 생각한다’)이다. 일회성의 비극이 아니라 동심원처럼 번지는 비극의 파동인 거다.

강남의 음주운전자에게 악의 같은 건 없었을 거다. 살해의 고의가 있었을 리도 없다. 가해자가 그 시간 그곳을 질주한 것도, 피해자가 그 건널목을 건넌 것도 우연이다. 화나는 건 이 지점이다. 음주운전은 가해자에게 해치려는 고의와 악의가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위험과 불운으로부터 삶을 보호하려는 인류의 모든 노력에 침을 뱉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불행은 닥치는 거야, 조롱하듯. 인류의 진보? 거창한 건 필요 없다. 막을 수 있는 불행을 막을 때 우린 진보한 거다.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ymle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