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7)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 20여년간 병석에서 동행

[역경의 열매] 김형석 (7)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 20여년간 병석에서 동행

함께 교회 다니다 만나 일본서 결혼… 고향에 돌아와 격동의 시기 동고동락

입력 2020-12-2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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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교수가 1979년 아내 고 김옥수 여사와 함께한 모습. 김 여사는 이듬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아내 김옥수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건 일제가 학도병을 징집한 태평양전쟁 막바지 무렵이었다. 내가 삶에서 동행하는 하나님을 굳게 믿었듯이 아내 역시 신앙 안에서 끝까지 나를 믿고 따라줬다. 함께 교회를 다니며 만난 아내는 무척 밝고 아름다운 감정을 가진 여인이었다. 우리는 1943년 일본에서 식을 올렸다.

하루빨리 귀국하고 싶었지만, 일본의 물자 사정이 좋지 않아 방도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기차표를 구하기도 힘들었으니 현해탄을 건너는 연락선을 타는 건 오죽했을까. 매일 귀국을 위해 기도했다.

도쿄를 떠나 교토에 머물던 어느 날 한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였다. ‘귀향’이란 제목의 독일 영화를 봤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돌아가라, 고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대사가 기억난다. 나 역시 고향에 돌아가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밤 검고 큰 말이 우리 집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꿈을 꿨다. 나를 태운 말은 순식간에 고향 집에 데려다주더니 사라졌다.

꿈에서 깬 나는 무작정 역으로 나갔다. 역 게시판에는 한반도와 만주로 가는 사람의 명단이 붙어있었다. 현해탄을 건너는 배표를 포함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일단 역사무실로 가서 평양행 열차표를 샀다. 나와 아내는 이렇게 일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어떻게 그토록 쉽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교통편을 신청해도 2~3주 넘게 걸리거나 못 구하던 때다. 게다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라 신청조차 못 한 상황이었다. 친구가 귀국 신청을 하며 내 이름도 넣은 게 아닌가 짐작한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38선 이북의 공산주의 사회를 경험하고 목숨을 건 탈북과 6·25전쟁, 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60여년을 아내와 동고동락했다. 아내가 61세 되는 해엔 함께 세계 일주 여행도 했다. 권사로서 교회 일을 열심히 했고 자녀들의 신앙교육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아내는 62세 때 뇌졸중으로 쓰러져 위독한 상태가 됐다. 주치의는 “살 희망은 없지만, 뇌수술은 해보겠다”고 했다. 아내를 먼저 보낼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아내는 기적같이 깨어났다. 그간의 우여곡절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말을 할 수 없었고 기억도 대부분 상실했지만, 아내의 생존은 우리 가족에게 큰 감격을 줬다.

23년간 병석에서 나와 동행한 아내는 2003년 여름 85세를 일기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평소 화를 잘 안 내던 아내는 병상에서도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을 소중히 여겨서 ‘일 다녀오겠다’고 하면 항상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내의 삶은 아름답고 착한 신앙의 선물 같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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