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과 몰락’… 맨유 돈벌이 이용에 폭발

국민일보

‘빚과 몰락’… 맨유 돈벌이 이용에 폭발

왜 팬들은 올드트래포드 난입해 시위를 벌였을까

입력 2021-05-07 04:05
한국시간으로 지난 3일 새벽, 중계를 기다리던 국내 해외축구 팬들에게 깜짝 놀랄 소식이 전해졌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최고 명문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트래포드에 현지 팬 약 200명이 난입했다는 소식이었다. 숙적 리버풀과 더비 경기를 불과 몇 시간 앞둔 때였다. 난입한 팬들은 구단주 글레이저 가문에게 물러나라고 외쳤다. 결국 경기는 미뤄졌다. 직원 중 일부가 시위대에 문을 열어줬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구단은 이를 부인했다.

영국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 수천 명이 지난 2일(현지시간) 홈구장 올드트래포드 앞에서 구단주 글레이저 일가의 퇴출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 중 약 200명은 불과 수 시간 뒤에 리버풀과 리그 경기가 예정된 경기장 안으로 난입했다. EPA연합뉴스

경기장 밖에도 군중 수천 명이 모였다. 시위대 일부는 1군 선수단이 머무는 로리 호텔로 가서 선수단 버스가 출발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선수 몇몇은 팬들과 직접 대화하고 싶다며 호텔을 나서려 했지만 안전을 이유로 구단 측에 제지당했다. 구단 직원들은 성난 시위대에 화를 입을까 올드트래포드 사무실 안에 갇혔다. 맨유가 글레이저 가문에게 매각된 2005년 이래는 물론,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된 1902년부터의 역사를 통틀어도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이번 사태를 촉발한 것은 최근 유럽 축구계를 뒤흔든 유러피언 슈퍼리그(ESL) 사태다. 그러나 맨유 팬들의 반응은 다른 팀 팬들보다 훨씬 극렬하다. 맨유 팬들은 11일(현지시간) 레스터시티와 홈경기, 13일 새로 잡힌 리버풀과 홈경기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위를 기획하고 있다.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현지 맨유 팬들과 구단주 글레이저 가문 사이에 그동안 쌓인 불신을 살펴봐야 한다.

글레이저 시대의 시작

글레이저 가문이 맨유의 최대 주주로 등극한 건 16년 전인 2005년이다. 2003년부터 말콤 글레이저는 야금야금 구단 지분을 늘려 2005년 5월 이후 75%까지 지분을 장악했다. EPL 절대강자로 군림해온 맨유가 주제 무리뉴의 첼시, 아르센 벵거의 아스널에 밀려 3위를 한 시즌이었다. 맨유의 많은 팬이 충격적인 성적에 좌절했지만, 이후 맨유가 겪은 변화는 리그 순위표에서보다 훨씬 더 큰 규모였다.

글레이저 가문은 맨유를 사는 데 자신들의 돈은 일부만 들였다. 글레이저 가문이 맨유 지분을 매입하는 데 든 7억9000만 파운드(약 1조 2300억원) 중 자기 자산은 2억7000만 파운드(약 4200억원)뿐이다. 이들은 추가로 필요한 돈을 빚으로 충당했고 이는 고스란히 맨유 구단의 부채가 됐다. 1931년 이래 부채가 없던 맨유는 덕분에 5억8000만 파운드(약 9100억원)의 빚을 지게 됐다.

여태까지 맨유가 지급해온 부채 이자와 글레이저 가문에 낸 고문료 등 인수 때문에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은 15억 파운드(약 2조3466억원)에 달한다. 글레이저 가문은 지금도 매년 구단에서 2000만 파운드(약 300억원)를 받는다. 자신들이 처음 투자한 2억7000만 파운드는 회수한 지 오래다. 현지 팬들이 그간 낸 입장료와 늘어난 광고·방송수익의 상당수가 여기 쓰인 건 물론이다.

물 새는 관중석, 낡은 훈련장

대부분 시즌티켓 소유자였던 강성 팬 약 4000명은 글레이저 가문의 인수가 구단의 정신을 더럽혔다며 맨유 지지를 철회하고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라는 구단을 창단했다. 이들은 남은 팬들이 글레이저 가문의 주머니를 채워주고 있다며 배신자라는 뜻의 ‘유다’로 불렀다. 팬들 일부는 글레이저 가문을 막아달라고 정부에 청원하는 등 행동에 나섰지만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데이비드 길 단장이 이들을 말렸다.

맨유가 미국 뉴욕 주식시장에 상장된 2012년 공동 구단주 조엘 글레이저와 아브람 글레이저 형제(오른쪽부터)가 주식거래소 직원의 설명을 듣는 모습. EPA연합뉴스

글레이저 가문 인수 직전 12년간 올드트래포드는 대규모 보수를 4번 거쳐 4만4000석이던 관중석을 6만8000석까지 늘렸다. 인수 이전에 확정된 공사로 관중석은 약 7만5000석까지 늘었다. 그러나 이후 한 번도 보수가 이뤄지지 않았다. 첼시나 아스널, 토트넘 홋스퍼 등 다른 구단이 경기장에 최첨단 설비를 갖추려 돈을 쏟아부었지만 올드트래포드에선 구단 레전드 보비 찰턴 경의 이름을 딴 동쪽 ‘보비 찰턴 경 스탠드’에 빗물이 샌다.

올드트래포드의 티켓값은 글레이저 가문의 인수 뒤 첫 5년까지 그대로였으나 이후 폭등했다. 2000년 개장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 최고라는 찬사를 듣던 캐링턴 훈련장은 보험중개사 에이온(Aon)에 이름을 팔아 ‘에이온 트레이닝센터’가 됐으나 옛날의 명성은 간데없다. 오랜 기간 시설·인적 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 탓에 팬들은 글레이저 가문이 구단을 상품화시켜 돈 버는 데만 급급할 뿐 정작 축구에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ESL 사태에 분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팬들은 왜 분노했을까

조엘 글레이저는 2005년 맨유를 인수할 당시 맨유의 구단 방송 ‘MUTV’에 출연해 팬들과 대화를 이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16년간 그는 단 한 번도 팬들에게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슈퍼리그 참가 철회 뒤 여론이 급격히 악화하자 내놓은 사과문이 2005년 약속 이후 그가 처음 내놓은 메시지다. 팬들은 구단의 앞날을 결정할 ESL 참가가 자신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도둑질하듯 이뤄졌다는 데 분노하는 한편 글레이저의 사과 메시지를 냉소했다.

글레이저 가문을 비판하는 팬들의 목소리는 전부터 꾸준했으나 영향력이 없었다. 2010년 현지 팬들은 구단의 초창기 상징색인 노랑과 초록색 머플러를 올드트래포드에서 펼치며 시위했지만 돈을 주고 관중석에 입장해 벌이는 시위는 오히려 조롱거리가 됐다. 2019년에도 온라인상에서 팬들이 올드트래포드 앞 시위를 기획했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지난해 2월 울버햄턴전에서는 팬들이 관중석에서 집단 퇴장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이번 슈퍼리그 사태가 오랜 세월 현지 팬들의 가슴에 쌓여온 분노를 마침내 터뜨렸다고 볼 수 있다.

현지 팬들은 맨유가 2013년 이래 리그를 우승 못 한 근본적 원인을 글레이저 가문에서 찾고 있다. 글레이저 가문이 맨유가 리그 우승으로 얻을 명예에는 별 관심이 없고 구단을 극단적으로 상품화시켜 얻을 단기적 수익에 몰두해왔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맨유가 유독 이름값·주급만 높고 활용도 떨어지는 ‘먹튀’ 선수들로 골머리를 앓은 점, 성과 없이 감독을 갈아치운 점도 이 같은 구단 운영 방침 때문이라 해석한다. 최고의 브랜드 이미지와 엄청난 팬층, 훌륭한 경기장 덕에 부자 구단주 없이도 오랜 시간 자급자족하며 발전해온 맨유가 이들 탓에 몰락했다는 분노다.

맨유의 미래는 달라질까

맨유 서포터 조직인 MUST(The Manchester United Supporters’ Trust)가 시위 이튿날 조엘 글레이저에게 보낸 공개서한에는 왜 이들이 분노했는지가 드러나 있다. 이들은 서한에서 글레이저 일가가 맨유를 ‘빚과 몰락’의 길로 몰고 갔다고 비난했다. 팬들의 구단 소유권 참여, 독립된 사외이사 임명, 주주로서 행사할 의결권 분산, 다른 대회 참여 고려 시 팬들과 대화를 골자로 한 4가지 요구안을 내세우며 7일까지 답을 달라고 요구했다.

올레 구나 솔샤르 감독은 5일 AS로마와 유로파리그 경기 사전 기자회견에서 “구단주들과 대화했다”며 “개인적인 사과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플로리다주에 머무르는 공동 구단주 아브람 글레이저는 전날 직접 자신을 찾은 스카이스포츠 기자가 팬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대답을 거부했다.

스포츠전문매체 디애슬레틱은 글레이저 가문이 팬들의 비판을 견디지 못해 구단을 팔더라도 현 구단 지분 가치인 21억 파운드(약 3조2900억원)보다 40% 이상 많은 30억 파운드(4조6900억원)에 넘길 것이라 내다봤다. 구단주가 바뀔 경우 맨유가 가진 부채에 대한 안정성 평가도 바뀌기 때문에 구단이 지불해야 하는 부채의 이자도 크게 늘어날 수 있다.

맨유 팬들을 포함한 현지 축구팬들은 독일 분데스리가와 유사한 ‘50+1’ 모델을 EPL 구단에 도입하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이는 구단 지분을 팬들이 최소 50% 이상 보유하게 함으로써 지분 과반을 소유하는 대주주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하고 구단 경영진 일부를 팬들이 투표로 뽑는 제도다. 그러나 이 역시 현실적으로 대규모 투자 매력 감소라는 문제가 엮여있다. 설사 이뤄지더라도 분데스리가 등에서처럼 구단 내부 정치와 갈등이 극에 달하는 등 부작용이 일 것이란 우려도 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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