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가시 없는 장미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가시 없는 장미

윤소정 패션마케터

입력 2021-11-22 04:07

초등학교 5학년 때 곱고 다정했던 담임 선생님이 소풍을 다녀오던 길에 아이들 대신 차에 치인 일이 있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달 넘게 입원을 해서 병문안 가던 길에 처음으로 꽃이라는 걸 사봤다. 선생님 닮은 예쁘고 좋은 꽃을 선물하고 싶어 가게 몇 곳을 기웃대다 크고 싱싱한 장미 한 다발을 샀다. 꽃을 들고 가던 중에 깊고 달콤했던 향기에 푹 빠졌다. 병실에서도 선생님과 꽃향기 얘기만 한참 나눴던 기억이 있다.

성인이 돼서 취미로 꽃꽂이를 배울 때 장미가 빠지면 주인공 없는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한 선생님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장미 말고도 주연을 맡길 만한 화려한 꽃이 많은데도 장미는 꼭 한 번 둘러보게 된다. 처음엔 가시를 다듬는 게 번거로워 양이 많거나 시간이 부족할 땐 생략하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가시 없는 장미 품종이 많아졌다. 덕분에 가시 손질 걱정이 많이 줄었다. 그런데 요즘 장미는 가시도 없지만 이상하게 향도 없다.

며칠 전 꽃 시장에서 유난히 탐스러운 장미가 눈에 띄어 무려 세 다발을 덥석 안아왔다. 포장을 뜯다 간만에 보는 거칠고 씩씩한 가시들에 잠시 당황했지만 마침 여유가 있던 참이라 차분히 정리해보려고 가시를 하나하나 잘라냈다. 그러다 코에 닿은 깊고 황홀한 향에 어릴 적 기억이 소환됐다. 도대체 얼마 만에 만나보는 진짜 장미 향인지.

문득 이제 가시도 없고 향도 없는 심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쓸쓸히 들었다. 취향도 생각도 확실하고 호불호도 분명했던 20대를 지나며 강한 색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그 많던 가시를 참 열심히도 다듬어댔다. 덕분에 이제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믿기 어려운 평도 듣고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나의 색들은 분명 잃었다. 잘 살아온 것인지 나를 버려 온 삶인지, 후회는 아니지만 나에게 좀 미안하다.

윤소정 패션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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