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한국과 세계, 보편주의의 길

국민일보

[여의도포럼] 한국과 세계, 보편주의의 길

성경륭 한림대 명예교수·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입력 2021-12-02 04:06

19세기 말 군주제와 양반제의 토대 위에 서 있던 조선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선택한 길은 구미 열강의 개항 요구에 저항하는 위정척사와 쇄국이었다. 그러다 명치유신을 통해 개항과 산업혁명의 길을 먼저 갔던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불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방과 함께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이라는 새로운 불행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 모순의 개혁을 회피하기 위해 선택했던 쇄국이 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됐다. 그렇다면 분단과 전쟁 다음에 한국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1960년대 이후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던 한국은 놀랍게도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나라로 변모했다.

우선 최근 10년 동안 한국의 무역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평균 90% 정도로 매우 높았고 무역 대상 국가의 수는 무려 237개로 늘어났다. 재외동포의 수는 749만명이며, 이들은 전 세계 180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유학 오는 외국인 학생은 16만명 정도인데 이들은 모두 181개국에서 입국하고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한류의 빠른 확산으로 세계 98개국에 1835개의 한류 동호회가 구성돼 있으며, 여기서 활동하는 회원 수는 무려 1억5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것을 보면 1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고립돼 있던 나라가 해방 후 50년 남짓한 기간에 세계와 가장 넓게 연결된 개방 국가로 바뀐 것이 확인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이 작년에 GDP 세계 10위, 글로벌 혁신지수 세계 10위, 대중문화 매력도 세계 2위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는 것이다. 최근엔 ‘오징어 게임’과 ‘지옥’, BTS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 올해의 아티스트상 수상 등에서 보듯 한류가 세계인과 공감·공명하는 놀라운 문화의 힘도 보여주고 있다. 쇄국과 수구로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가 개방과 개혁으로 천지개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세계를 누비며 수출, 생산, 노동, 학업, 봉사 등 갖가지 일을 했고 활동 공간을 세계 곳곳으로 확장했다. 그래서 개방의 전 세계적 확장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구속하기도 하는 결정적 생존 조건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가 과연 한국에 무엇이며 어떤 태도로 세계에 접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세계는 한국인에게 대체로 공존과 공생의 동반자라기보다는 이용과 활용의 대상으로 인식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세계에 대해 한국인들은 열등감과 우월감의 잣대, 일반적 배제와 선택적 포용의 시각으로 접근했던 것은 아닐까.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보다 강한 나라와 국민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느끼고 선택적으로 포용했으며, 반대로 약한 나라와 국민에 대해선 우월감을 느끼고 일반적으로 배제하는 접근을 했으리라. 세계에 대한 이런 이중적 인식과 태도는 고도성장기까지는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 교역, 인적 교류, 재외동포 이산, 한류 확산 등으로 넓고 깊게 연결된 현시기에도 과거와 같은 접근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우리보다 경제력과 학력이 떨어지는 나라와 인종집단을 배척하며 국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민족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다. 둘째는 세계와 세계인들을 존중하고 인권·민주주의·평화·다자주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보편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셋째는 이 두 가지 길을 병행하는 경우다.

이 중 첫 번째의 길은 가장 위험하며, 세 번째의 길은 불신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가장 지혜로운 길은 두 번째의 길, 즉 세계의 공의를 따르고 공익에 헌신하는 보편주의의 길이다. 일찍이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부력(富力)과 강력(强力)보다 문화의 힘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그것으로 세계의 평화가 실현되는 나라를 원한다고 했다. 단군사상의 핵심도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이상이었다. 전 세계와 연결된 대한민국의 생존 조건은 놀랍게도 우리가 좁은 민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전 세계를 품고 세계 공익에 기여하는 보편주의와 세계공헌국가를 지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성경륭 한림대 명예교수·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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