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의 문화스케치] 엄마들에게

국민일보

[오은의 문화스케치] 엄마들에게

입력 2021-12-18 04:03

엄마에게 자주 전화한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횟수가 늘었다. 엄마 주변에 친구들이 없어서가 아니다. 엄마는 텃밭을 가꾸며 더욱 바쁘게 살고 계신다. 그럼에도 집에 들어갔을 때 손수 불을 켜야 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엄마다. 어둠 속에서 전등 스위치를 찾아 손으로 벽을 더듬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엄마는 혼자임을 실감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겠으나 이따금 정체 모를 감정에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서러움일까, 외로움일까, 허전함일까. 나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가족이라고 해서 그 감정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번은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아 걱정이 됐다. 엄마에게도 사생활이 있을 텐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돼 연거푸 전화를 했다. 한참 뒤에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무슨 일 있었어?” 나의 다급한 물음에 엄마가 짐짓 여유를 부렸다. “무슨 일 있었지.” “무슨 일?” “혼자 오래 걷다 돌아왔어.”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엄마가 혼자 오랫동안 걷는 장면을 떠올렸고, 걸음걸음에 엄마가 떠올렸을 생각들을 떠올렸다. 누군가 떠올린 것을 내가 떠올리는 일, 불가능에 가까운 이 일이 나는 이해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걸어서 좋았어?” “응, 좋았지.” 엄마의 말에는 기운이 있었다. 스스로를 긍정하는 기운.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그러던 와중에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휴머니스트, 2015)을 읽게 됐다. ‘만화계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하비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난 뒤였다. 사두고 읽지 않은 무수한 책 중 하나였는데, 더 늦기 전에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들’은 하비상의 ‘최고의 국제도서 부문’을 수상했는데, 2020년에 김금숙 작가가 ‘풀’(보리, 2017)로 같은 상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 만화가 2년 연속 쾌거를 거둔 셈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이야기를 쓰고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김금숙 작가, 아들로서 ‘진짜 엄마’의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자 한 마영신 작가를 떠올렸다. 창작하면서 그들이 부단히 떠올렸을 사람도 함께.

‘엄마들’에 등장하는 엄마는 그동안 미디어에서 보이던 엄마와는 다르다. 모성애라는 굴레에서 무조건적으로 희생하지도 않고, 무너져가는 집안을 일으키는 억척스러움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불안한 노후를 걱정하고, 제대로 된 사랑을 꿈꾸며, 권리를 찾기 위해 동료들과 힘을 합치는 엄마다. 삶의 지혜도 있으나 새로운 것 앞에서는 서툰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용역업체 직원으로 건물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주인공 소연에게는 음악을 하는 막내아들이 있다. 그는 게임으로 소일하며 좀처럼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는데, 어느 날 아들에게 소연이 말한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야. 엄마는 여태껏 평생 혼자 살아본 적이 없어. 이제 혼자 있고 싶다. 6개월 시간 줄 테니까 그때까지 집 구해서 나가.”

혼자 있고 싶다는 소연의 말은 생활력 없는 아들을 비난하기 위해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물론 아들이 독립해야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할 것이라는 혜안이 있었겠지만, 그는 정말 혼자 있는 상태가 절실했을 것이다. 혼자 있어야 할 수 있는 일, 홀로의 상태에서만 찾아오는 가능성 같은 것을 그는 헤아렸을 것이다. 함께해야 빛나는 시간이 있고 혼자 할 때 차오르는 시간이 있다.

엄마가 혼자 걸으면서 떠올렸을 풍경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것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토대로 앞으로의 인생을 가늠하는 일, 누군가의 딸과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으로 우뚝 서보는 일이 아니었을까. ‘자식’이 아닌 ‘자신’을 생의 맨 앞에 둘 때, 비로소 되찾은 활기가 있었을 것이다.

‘엄마에 대하여’(다산책방, 2021)에 실려 있는 한정현의 단편 ‘결혼식 멤버, 結婚式のメンバ―’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생각들을 했어요. 친엄마라는 건 친한 엄마의 줄임말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거요.”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같이 있는 시간뿐 아니라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혼자 있을 때 생기는 거리감이 다시금 관계에 들어서는 데 도움이 된다. 역할도, 과업도, 관계도 없이 오직 나로 있는 시간, 이 시간이 나를 나로 단련시켜준다. 이 세상 엄마들에게 더 많은 시간이 함께하기를.

오은 시인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