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의 문화스케치] 툭, 그리고 툭툭

국민일보

[오은의 문화스케치] 툭, 그리고 툭툭

입력 2022-01-15 04:02

눈앞으로 귤 하나가 툭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근처에 귤나무가 있을 턱이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 바닥에 놓인 귤을 바라보니 누군가 껍질을 막 까기 시작한 것 같았다. 추측건대 창문을 열고 귤을 까다가 실수로 그것을 떨어뜨린 모양이다. 위를 올려다보니 건물에 나 있는 창문은 일제히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 본인도 당황스러워서 황급히 창문을 닫았을 것이다. 행인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속앓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놀라 귤을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불쾌한 와중에도 실소가 툭 비어져 나왔다.

길바닥을 툭툭 건드리며 동네를 걸었다. 추위는 싫지만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순간은 꽤나 괜찮았다. 뒤늦게 착지한 낙엽들이 발에 툭툭 챘다. “지갑 안 가져왔어?” 편의점 앞에서 툭 쏘아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왜 안 가져왔을까?” 그 앞에서 하릴없이 툭 터지고 마는 표정이 있었다. 자문자답을 할 때, 답이 나오지 않으면 막대기가 툭 부러지는 기분이 들고 만다. 툭 불거지는 갈등을 뒤로하고 다시 걸었다. 퇴근길을 책임지는 만원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뭇사람과 어깨를 툭 부딪치고 무릎을 툭툭 부대끼며 남은 정거장을 머릿속으로 세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딴생각하는 사이, 마음과 발걸음의 무게가 달라 균형을 잃기도 할 것이다.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에 마음먹고 외출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양쪽 귀가 벌게지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경에는 쉴 새 없이 김이 서리고 있었다. 숨이라도 돌릴 겸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삼삼오오 모여 공을 차던 아이들도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툭 트인 공터가 쾌적하다기보다 황량하게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 정말… 죄송했어요.” 툭툭 끊어지는 목소리였다. 한 남학생이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었다. 마스크 뒤로 갸웃하는 표정이 보였을까,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 귤이요… 제가 까다가 그만….” 예의 실소가 폭소가 돼 터져 나왔다. “괜찮아요. 찬바람에 놀란 거죠?” 그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더니 왔던 길로 부리나케 사라졌다. 가는 길에 자신이 길바닥에 떨어뜨렸던 귤을 줍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추위를 잘 타는 나인데, 아무래도 그 사람 덕분인 듯싶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가 전해준 온기가 올겨울 내내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귤이 툭 떨어졌을 때의 당혹스러움이 툭툭 끊어지는 목소리의 진심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갑자기’가 빚어낸 작은 기적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툭’과 ‘툭툭’이 갖는 난데없음이 불쾌함에서 반가움으로 변모했을 때, 사람에게 실망했던 나는 다시금 사람을 희망하게 됐다. 한 시간 동안 한 단어가 가진 미묘한 차이를 제대로 체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하기 위해 맹추위를 뚫고 나온 그의 결심이 겨울보다 더 꼿꼿하다고 느꼈다.

집으로 발길을 향하는데 외투 하단에 실오리가 보였다. 날렵하게 잡아 뜯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툭 비어져 나온 것을 잘못 건드렸다간 낭패를 볼 공산이 크다. ‘툭’의 두 얼굴을 떠올리며 참아야만 했다. 어떤 툭은 가볍고 어떤 툭은 무거우니까. 치고 지나가는 툭도 있으나 가슴 깊숙한 곳에 내려앉는 툭도 있으니까. 친근감을 자아내는 툭도 있지만 무례한 툭 앞에서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으니까. 어깨를 툭 쳤을 때 반색할 수도 있지만 정색하거나 난색을 표할 때가 더 많으니까. 좋은 쪽으로든 싫은 쪽으로든 툭은 일상을 뒤흔든다.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에 온몸이 휘청일 때도 있다. 어떤 말은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줄 때는 다정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하루 걸러 툭툭 불거지는 문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 삶의 행로에서 돌부리에 툭 걸려 넘어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때 툭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툭은 무겁고도 가벼우며,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말이다.

봄철에 지면을 뚫고 싹을 틔우는 것들을 생각한다. 시작은 분명 ‘툭’이었을 것이다. 툭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도, 툭툭 터지는 꽃망울도 안간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툭’과 ‘툭툭’은 새해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오은 시인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