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메멘토 모리

국민일보

[빛과 소금] 메멘토 모리

신상목 종교부장

입력 2022-01-15 04:02

석 달만 있으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된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할머니는 장손을 끔찍하게 여기셔서 늘 당신 옆에 데리고 주무셨다. 할머니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과 다음 날 새벽 기도를 하셨다. 기도 패턴은 비슷했다. 온 가족을 위해 기도하시고 주기도를 외우신 다음,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기도했다. “하나님요, 저를 잠자는 중에 데려가 주세요.” 나는 할머니의 이 기도를 잠결에 듣곤 했는데 혹시나 그 기도가 응답될까 봐 한밤중에 할머니를 유심히 관찰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장수를 누리시다가 온몸의 힘을 소진하신 뒤 기도대로 주무시다 떠나셨다.

코로나 상황 때문일까. 유난히 부고를 많이 접한다. 간혹 코로나로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대부분 지병과 고령으로 별세하셨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인물의 부음을 듣기도 했다. 가까운 분의 발병 소식을 접할 때는 당혹스러웠다. 유발 하라리가 예견한 것처럼 인간 불멸 시대가 머지않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현실은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이다.

매일 발표되는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 무뎌진 지 오래다. 디지털로 처리된 사망 숫자는 그 너머 유족들의 깊은 슬픔과 절망, 황망함은 말해주지 않는다. 코로나 상황으로 장례식장조차 쓸쓸해졌다. 온라인 부고와 계좌 이체로 조문할 수밖에 없는 이 무정한 시대가 원망스럽다. 죽음은 마치 지방 경찰청이 제공하는 ‘어제의 교통사고’ 현황판 사망자 수만큼이나 남의 일이 되고 있다.

하지만 죽음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이 숫자나 무감각 속에 갇힐 순 없다. 죽음은 삶 한가운데서 만나기 때문이다. 남의 일도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어떻든지 간에 이 죽음과 마주해야 한다.

대문호 톨스토이도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열세 명 자녀 중 다섯은 유년 시절을 넘기지 못했고, 전장에서는 총에 맞거나 폭탄에 찢긴 사람들을 목격했다. 형이 폐결핵으로 죽을 때는 곁에서 임종을 지켜봤다. 톨스토이의 어머니는 그가 두 살 때 죽었고 아버지는 아홉 살 때, 할머니는 열 살 때 죽었다. 그래서일까. 톨스토이는 평생 인간의 고통과 죽음,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강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강박과 고통은 작품 속에도 투영돼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형의 죽음 장면과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언제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메멘토 모리’(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를 표현했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가 삶을 마치는 과정을 통해 인생을 재평가하고 사랑이 유일한 삶의 규범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냉혹한 코로나 시국은 어쩌면 메멘토 모리의 적기일 수 있다. 교훈적 메시지도 찾을 수 있다. 올해 103세 되신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죽음은 극복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다… 마지막 순간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로 맞이하고 싶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것이다”라고 했다. 말기 췌장암 투병 중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도 본보 인터뷰에서 메멘토 모리를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 현재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의 지혜로 설명했다. 그는 암 투병을 통해 죽음과 친해졌고 운명을 사랑하고 탄생의 신비를 배우고 있다고 고백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마침이 아니다. 신자는 죽음 이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빌 1:23)이며 하늘나라에 무사히 들어가게 된다(딤후 4:18). 그리고 언젠가는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말미엔 ‘영광의 문’이 등장한다. 신성한 환희와 찬란함이 넘치는 천국의 입구다. 우리 모두 이 문 앞에서 만날 것이다. 그때까지 자기 죽음을 준비하고 슬픔을 당한 이웃을 위로하며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하자.

신상목 종교부장 smshi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