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칩거 정치

국민일보

[한마당] 칩거 정치

고승욱 논설위원

입력 2022-01-17 04:10

국어사전은 ‘나가서 활동하지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음’이라고 칩거(蟄居)를 정의한다. 흔히 쓰는 ‘잠수 탄다’는 말과 가깝다. 하지만 이는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는다는 뜻의 속어여서 예의를 갖춰 말할 때는 쓰지 않는다. 게다가 정치인의 칩거에서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외부 활동을 잠시 중단한다는 깊은 뜻을 읽어야 한다.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이해가 되는 말이다.

과거 정치 무대를 흔들었던 거물급 정치인들은 칩거를 활용했다. 18년간 박정희정권의 2인자였던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1968년 3선 개헌파와 갈등을 빚다 부산에 칩거했다. 당시는 4년 중임제였으니 JP는 눈엣가시였다. 그는 칩거를 마치고 국회의원과 당의장 사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차기 대통령에 바싹 다가섰던 JP에게 칩거는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아들이기 위한 결단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칩거로 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면서 개헌을 약속했다는 ‘내각제 각서’가 공개됐던 1990년 일이다. 평생 민주화에 헌신했다더니 신군부 세력, 유신 세력과 야합했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경남 마산으로 가 칩거했다. 그러고는 국민이 반대하는 개헌은 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내각제 약속을 뒤집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은 칩거 정치의 승리였다.

이후 정치인 칩거가 종종 등장했지만 대부분 결정적 한 방 대신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대선 문턱에서 번번이 주저앉았던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는 강원도 춘천과 전남 강진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옥새 파동’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셀프 공천’의 김종인 전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도 칩거로 난국을 돌파하려 했다. 이제는 3김시대 정치 문법을 아는 사람들이나 칩거의 뜻을 곱씹는 SNS의 시대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4일의 칩거를 마쳤다. 방법은 약간 올드 스타일이었지만 지지율을 끌어올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찾았을지 궁금하다.

고승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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