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골때녀’ 사오리를 위하여

국민일보

[세상만사] ‘골때녀’ 사오리를 위하여

강준구 사회2부 차장

입력 2022-01-21 04:07

매주 목요일 아침이면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다. 수요일 밤부터는 포털사이트의 연예 뉴스는 실수로라도 쳐다보지 않는다. 지뢰밭 스포일러를 피해 지하철에 올라타는 데 성공하면 비로소 전날 밤 방송된 ‘골때리는 그녀들’을 스마트폰으로 본다. 지하철을 갈아타면 출근이 더 빠르지만 이날은 예외다. 출근길이 끝나면 나머지 분량은 퇴근길을 위해 아껴 놓는다.

시즌1 최약체 구척장신이 시즌2에서 ‘쌍소(송소희·황소윤)’ 투톱을 앞세운 원더우먼을 예상 밖 화력으로 밀어붙였다. 헛발질만 하던 구척장신의 이현이가 골망을 가를 때, 엎드려 우는 대신 포효할 때, 전율했다. 축구팬은 젊은 남성이 많다 보니 과거 군대 발언 탓에 이현이 안티팬도 생겼다는데, 뭐 어때.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인간적인 성장 스토리다. 남자든 여자든, MZ세대든 X세대든 공 잘못 차고, 게임 지면 부아가 치미는 건 매한가지더라. 돌아보면 우리는 남녀로 갈라지기 이전에 모두 인간이 아니던가.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는 게 인류애의 위대한 첫걸음이다.

시즌2에서 정혜인(액셔니스타), 윤태진(아나콘다), 오나미(개벤져스)가 일취월장하고 있지만 ‘최애’ 캐릭터를 꼽으라면 후지모토 사오리(월드클래스)를 뽑는 데 망설임이 없다. 시즌1 내내 154㎝의 단신 핸디캡을 극복하고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사오리는 인생도 그만큼 열정적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시작된 왕따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친구 하나 없이 지낼 때 유일하게 손을 내민 이들은 학교 소프트볼 클럽이었다. 그가 공개한 한 장의 사진엔 소프트볼 클럽 멤버들 끝에서 그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담겨 있다. 위기에 처한 청소년이 마지막에 붙잡은 동아줄은 어른이 될 때까지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평창 동계올림픽 패럴림픽 홍보대사를 시작으로 한국 활동을 시작했다. 직업은 수어(수화언어) 아티스트다. 청각장애인을 돕기 위해 한국 수어를 공부하고 있다. 소프트볼 말고 다른 운동은 접해본 적이 없었는데 골때녀에서 처음 축구에 도전했다고 한다. 스피드 외엔 별것 없었던 그는 시즌1 말미에 보기 드문 포처(poacher)형 공격수로 탈바꿈했다. 한 박자 빠르게 슛을 하고, 스피드로 수비진을 농락하며, 양발로 공을 다룬다. 아나콘다와의 경기에서 오른발 슛이 수비에 막히자, 곧바로 오른발로 한 번 접은 뒤 왼발로 골대 상단에 때려 넣은 슛은 축구팬 사이에서 “공 좀 찬다는 남자도 잘 못 하는 것”이라는 극찬이 쏟아졌다. 토트넘 홋스퍼의 손흥민을 닮은 그의 ‘치달’(공을 길게 차 놓고 달려 수비를 제치는 것)은 볼 때마다 짜릿함을 선사한다. 미드필드에 서서 호시탐탐 뛰어들 틈을 노리는 그를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어려운 청소년기를 거쳐 삶에 몇 안 되는 기회를 부여잡은 그의 열정이 어른거려서일 수도 있겠다. 사실 골때녀는 축구를 매개로 삶을 다루는 예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다 보면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할 때가 생기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대체로 최선을 다하며 산다. 삶이 강요하기도, 자발적으로 나설 때도 있지만 어쨌든 사는 건 도전의 연속이요, 각자의 최선이 겨루는 경쟁이다.

시즌2에선 3개의 신생팀이 1년 이상 훈련해온 기존팀을 상대로 도전을 진행 중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하는데 패배로 그걸 증명하고 있는 거 같아서…팀원들이 포기할까 걱정”이라는 전패팀 에이스 윤태진의 고백은 울림이 있다. 열정으로 무장한, 더 많은 사오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인류 평화가 그대들 발끝에 달렸다.

강준구 사회2부 차장 eye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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