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늙은 검사의 가치

국민일보

[가리사니] 늙은 검사의 가치

양민철 사회부 기자

입력 2022-01-24 04:06

일흔여덟 살 배우 오영수씨가 출연하는 대학로 연극 ‘라스트 세션’은 마지막 공연까지 매진 세례다. 가물에 콩 나듯 나오는 취소표 잡기가 설 연휴 기차표 예매보다 어렵다고 한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씨가 지난 10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대중의 관심이 재차 폭발했다.

그의 연기 인생 60년에서 이만큼 주목을 받은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일 터다. 지난 주말 ‘라스트 세션’에서 1시간30분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역으로 분한 오씨를 보며 이런 생각은 더 짙어졌다. 초로를 훌쩍 넘은 ‘대학로 터줏대감’은 만원 객석의 박수갈채에 가볍게 웃기만 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은 오래 남는 것을 더는 미덕으로 쳐주지 않는다. 법조계에서, 거기서도 검찰은 특히 그렇다. 검찰총장 정년은 65세, 검사는 63세지만 ‘영전’을 못하면 ‘용퇴’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잘나가는 사람만 옷을 벗는 건 아니었다. 올라야 할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지방 검찰청을 전전하면 후배들의 시선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고 어떤 이는 토로했다. 정년을 채운 검사가 드문 이유다.

변화의 조짐은 불고 있다. 지난달 6일 국민일보가 32년 검사생활을 마무리한 홍효식 서울고검 검사를 만났을 때 그는 “가라는 곳에서 일하는 게 공직자의 직분”이라고 했다. 검찰총장이나 검사장에 오르진 못했다. 품만 들고 폼은 안 나는 ‘깡치 사건’이 그의 몫이었다. 대신 깡치 검사는 ‘윤금이 사건’ 유족을 위해 미군에서 억대 배상을 받아냈고 국가 송무를 대리해 10조원 넘는 나라 재산을 지켰다. 역대 검찰총장은 44명이지만 공판·송무 1급 공인전문검사(블랙벨트)는 홍효식 한 명이다. 검찰 내 많은 이가 그의 정년에 고개를 숙인 이유다.

그런 검찰에선 최근 인사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수습됐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검사장 자리에 중대재해 사건 전문가를 올리겠다고 선언하면서였다. 이례적인 인사에 검사들은 동요했다. 승진 기수(28~30기)에 중대재해 전문가라고 할 인물이 별달리 없는 상황에서 정권 말 ‘낙하산 알박기’ ‘보은 인사’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자 박 장관은 ‘외부 전문가’를 뽑겠다고 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친정권 인사를 앉히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쏟아졌다. 김오수 검찰총장마저 반대 의견을 내자 박 장관은 결국 검사장 인사를 백지화했다. 그는 이후 광주 서구 신축 아파트 붕괴사고 현장을 찾아 사진을 찍고 보도자료를 냈다.

중대재해 사건 전문 검사장이 무고한 노동자·시민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면 당장 인사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편 말에 귀가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검찰 내부망에 올라온 글이다. “광주 학동 사고 때 보니 검사·수사관·실무관 할 것 없이 몸속의 즙을 짜내서 일을 하더라고요. 전문가를 뽑아 일선을 지원한다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큰절이라도 할 판인데, 일선 지원할 인력이 아니라 검사장급을 뽑는다니 절로 고개가 갸우뚱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솔직히 수사 실무적인 부분에 검사장님들 큰 도움 안 되는 거 사실이잖아요.”(정유미 광주고검 검사)

20년 넘게 일한 검사들 중 6, 7명의 손에만 닿는 검사장 자리를 위해 출신지·학교별로 줄을 서고, 정권 입맛에 맞는 결과물을 내던 검찰 인사의 폐단은 이번 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민감한 수사를 한 검사는 좌천됐고, 핵심 요직은 친정권 성향 인사로 채워졌다. 그럼에도 전국 검찰청에선 말 없는 검사들이 묵묵히 수사 기록을 넘기고 있다. 불 꺼진 무대 뒤에서 직분을 다하는 이들이 대한민국 형사사법 시스템을 돌리고 있다. 임기 넉 달 남은 정치인 장관으로선 감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국민은 결국 이들을 조명할 것이다.

양민철 사회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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