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빡치든 말든

국민일보

[뉴스룸에서] 빡치든 말든

강창욱 국제부 차장

입력 2022-01-24 04:03

2017년 말 나는 대학 동창과 라오스를 여행 중이었다. 수도 비엔티안에서부터 방비엥을 거쳐 루앙프라방까지, 4박 일정 치고는 강행군을 했다. 사흘째 아침이었을 것이다. 산책 중에 루앙프라방 메콩강가의 한적한 부두에서 수도승이 입을 법한 복장을 하고는 대빗자루로 누런 계단을 묵묵히 쓸고 있는 젊은 서양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뉴에이지풍 행색이 흥미로워서 인사를 던진 김에 말을 붙였다.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대학생인데 루앙프라방에 머물며 마음을 정화하고 있다고 했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청소는 인류가 환경을 너무 오염시켜서 자성의 마음으로 하고 있노라 설명했다. 딱히 아는 게 외신 뉴스라 프랑스 대통령 얘길 꺼냈다. 그해 5월 서른아홉에 당선된 77년생 에마뉘엘 마크롱에게 젊은 프랑스인은 기대감을 내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수도승 복장의 젊은 프랑스인은 인상부터 구겼다. 권위적 태도, 인기영합주의, 친기업 행보 이런 것들을 늘어놓으며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선행지표였을까. 꼭 1년 뒤인 2018년 12월 여론조사에서 마크롱의 지지율은 반의 반 토막이 나며 바닥을 굴렀다. 유류세 인상 강행은 대규모 퇴진 시위에 불을 당겼다. 부결되기는 했지만 불신임안까지 발의됐다. 당시 대통령 해임을 요구했던 야당 의원들은 마크롱 한 사람이 정부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며 그의 제왕적 국정 운영 실태를 비판했다.

마크롱은 그해 마지막 날 신년사에서 시위대의 분노를 새해 가르침으로 삼겠다고는 했지만 그 대상이 자신이라는 건 모른다는 듯 모호한 장광설을 늘어놨다. “멀리서부터 온 분노가 터져 나왔다. 부조리에 대한 분노, 세계화 과정에 대한 분노, 너무 복잡해지고 인정이 결여된 행정체제에 대한 분노….” 번지르르한 수사는 마크롱 자신을 보호하고 포장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일부의 극단성을 부각하며 시위 의미를 깎아내리는 데 더 공을 들였다.

결국 새해에도 그는 자세를 낮추지도, 태도를 바꾸지도 않았다. 반정부 시위는 테마를 바꿔가며 반복됐다. 2019년에는 연금개혁, 2020년에는 코로나19 봉쇄 조치, 지난해에는 백신패스 도입이 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그때마다 메콩강가에서 만났던 프랑스인도 그 속에서 “마크롱 퇴진”을 외치고 있을까 상상했다. 마크롱은 이달 초 올해 첫 언론 인터뷰에서 백신 미접종자들을 두고 “그들을 (생활하기 불편하게 해서) 열받게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원래 사용한 프랑스어 ‘emmerder’는 더 저속한 표현인데 우리말로 뉘앙스를 살리자면 ‘빡치게 하다’쯤 되겠다.

석 달 뒤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마크롱의 막말은 실언인가 싶지만 오히려 ‘선거 직전’이기에 계산된 발언이었으리라는 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 뉴욕타임스 오니시 노리미츠 파리특파원은 “미접종자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활용하는 것이 자신을 지지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백신 반대 소수자를 화나게 할 위험보다 더 많은 잠재적 선거 이점을 갖고 있다고 계산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진단했다. 12세 이상 프랑스인 중 미접종자는 10%도 안 된다.

남의 나라 대통령 험담이나 하려는 건 아니다. 거친 언어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백신패스를 강요하는 한국의 ‘미접종자 제로’ 정책도 결국 같은 셈법 위에 있을 게다. 미접종자들이 K방역 신화를 망가뜨린 주범이라도 되는 양 기필코 주삿바늘을 꽂고야 말겠다는 정부의 오기. 선거를 앞둔 마당에 그들이 의미 있는 규모의 다수라면 이렇게 옥죄기 어려울 것이다. 프랑스에서나 한국에서나 미접종자는 ‘버려진 표’ 취급을 받고 있다.

강창욱 국제부 차장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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