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소확행과 심쿵 공약 ‘노 땡큐’

국민일보

[돋을새김] 소확행과 심쿵 공약 ‘노 땡큐’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입력 2022-01-25 04:08

인천 강화도의 조양방직은 흥미로운 곳이다. 1933년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근대식 방직공장으로, 넓은 마당 한쪽에 남아 있는 금고 건물에서 지게로 돈을 지고 날랐다고 할 만큼 번창했다. 1960년대 이후 직물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가동을 멈춘 공장은 수십년간 폐허로 버려졌다가 2018년 카페로 탈바꿈했다. 여공들이 나란히 앉아 일하던 작업대는 커피 테이블이 됐고, 카페 주인이 수집한 골동품과 이색적인 소품들이 곳곳에 자리 잡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옛날 다이얼 전화기, 빈티지 라디오, 브라운관 TV 등 레트로 분위기가 물씬한 그곳에서 이런 표어가 적혀 있는 벽보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안 속는다, 바로 찍고 후회 말자!!’ 1967년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선거 포스터로 짐작되는데, 민중당 소속으로 부산에서 출마한 후보의 이름 위에 굵은 막대기 3개가 그려져 있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유권자들을 위해 당시에는 기호 3번 숫자와 함께 막대기로 기호를 표기했다고 한다.

세로쓰기로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 벽보에는 후보의 약력과 포부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백성의 쓰라림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겠읍니다’ ‘우리 당은 썩고 낡은 정치를 모라내겠읍니다’ ‘여러분을 위해 생명 바쳐 싸우겠읍니다’ ‘억울하고 비싼 세율을 인하하겠읍니다’ ‘밀수를 조사하고 부정을 적발하겠읍니다’ ‘상급학교 진학을 자유로이 하겠읍니다’. 잔뜩 멋을 낸 후보 얼굴만 큼지막한 요즘 선거 포스터보다 내용이 알차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쏙쏙 와닿는 구호 ‘이번에는 안 속는다, 바로 찍고 후회 말자!!’다. 44일 앞으로 다가온 이번 대통령선거에선 다행스럽게도 쉽게 속지는 않을 것 같다. 후보들의 밑천과 약점이 이렇게 민망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난 선거가 없었으니 말이다. 안 속을 수는 있지만 그래서 바로 찍기가 더 어렵고, 누구를 찍어도 후회할 것 같은 씁쓸한 선거이기도 하다.

네거티브로 점철됐던 대선전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정책 대결이 본격화됐다며 이 후보의 ‘소확행 공약’과 윤 후보의 ‘석열씨 심쿵 약속’이 조명되고 있다. 국민의 소소한 행복에 관심을 쏟고 설레게 만들겠다는 섬세함과 자상함은 고맙지만 글쎄. 굳이 대통령 후보가 나서지 않아도 소확행은 가족과 함께하는 조양방직 주말 나들이 정도로 유권자가 스스로 챙길 수 있고, 심쿵은 BTS나 ‘그해 우리는’의 최우식 같은 훨씬 뛰어난 심쿵 유발 전문가들이 있다. 생활밀착형 맞춤형 핀셋 공약이라고 포장된 이런 약속들을 내세우는 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썼던 ‘마이크로타깃팅’ 전략이라는데,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는 매크로한 비전을 담은 중대형 공약이 뒤로 밀려났다. 기억에 남는 건 탈모 건강보험 적용과 여성가족부 폐지 아닌가.

그동안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대선 후보들의 부동산 공약과 세금 관련 공약을 살펴봤다. 이번 주에는 연금 개혁 공약에 대한 인터뷰를 준비했다. 가물에 콩 나듯 호평을 받은 공약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공약들은 모두 경선에서 이미 탈락했거나 현재 지지율 3, 4위 후보들의 것이었다.

SNS에 몇 글자짜리 한 줄 공약을 발표해 재미를 봤다는 후보도 있으니, 유권자들도 SNS에 한 줄씩 원하는 공약을 이어 말하는 공약 챌린지라도 해보면 어떨까. 후보들이 내놓지 않은 공약이 있다면 계속 요구하고 질문해서 내놓게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임기 내 연금 개혁’ ‘구체적인 기후위기 대응’ ‘제왕적 대통령 권한 축소’ 이런 것들이 떠올랐다. 이쯤에서 되뇌어 본다. ‘이번에는 안 속는다. 바로 찍고 후회 말자!!’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