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86세대 정치인, 이젠 떠날 때다

국민일보

[데스크시각] 86세대 정치인, 이젠 떠날 때다

하윤해 정치부장

입력 2022-01-27 04:02

‘민주화’는 민주주의로 가는 이행 과정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진단했다. 최 명예교수는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더 어렵다”면서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지적했다. 최 명예교수는 위기를 불러온 이유 중 하나로 “민주 세력이 보여준 무능력”을 꼽았다.

한국은 민주화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큰 빚을 졌다.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86(80년대 학번·60년대생) 세대’ 일부는 양김(김영삼·김대중)의 스카우트로 정계에 진출했다. 20대 때 총학생회장 타이틀을 가졌던 86세대의 맏형들은 이제 환갑을 맞기 시작했다.

86세대 정치인들이 한국의 민주화에 공을 세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에 기여한 것은 없다. 그들은 국회의원 배지를 단 뒤 여야 구분 없이 기득권의 일원이 됐다. 그 많은 86세대 스타 의원 중에 대통령 후보감은 한 명도 없다. 인지도만 높을 뿐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는 증거다.

86세대 정치인들은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여당이 된 뒤에는 침묵했다. 청와대 눈치를 봤다. 문재인정부가 잘못된 방향의 부동산 정책을 펼칠 때 “아니다”라고 외쳤던 86세대 정치인들은 없었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그들도 책임이 있다. 문재인정부가 야당의 동의를 얻지 않고 임명을 강행한 장관은 모두 18명이나 된다. 하지만 86세대 의원들은 그 순간에도 식물 정치인의 길을 택했다.

대비되는 장면이 있다. 이명박정부 때였던 2011년 1월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는 전관예우 논란 등으로 낙마했다. 당시 남경필 정두언 등 소장파 의원들이 먼저 들고일어났다. 특히 남경필은 “과거처럼 여당을 통과의례 정도로 여기지 말라”고 경고했다. 학생 운동권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청와대에 맞서는 데 86세대 의원들보다 용감했다.

86세대 정치인들의 도덕적 우월감도 문제다. 2017년 11월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전희경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은 “주사파, 전대협이 장악한 청와대”라고 공격을 가했다. 이에 대해 임종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5공, 6공 때 정치군인이 광주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할 때 의원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살피지는 않았다”면서 “그게 질의입니까”라고 따졌다.

전 의원의 ‘색깔론’도 문제였지만, 임 실장의 고압적 자세에도 뒷말이 나왔다. 최근 만난 더불어민주당 중진의원은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운동권의 선민의식이 없는 것은 정말 큰 다행”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의 86세대 정치인들이 2000년 5월 17일 5·18민주화운동 전야제 행사를 마친 뒤 광주 단란주점에서 술판을 벌였던 것은 지울 수 없는 오점이다.

민주당에서 ‘86 용퇴론’이 분출하고 있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물꼬를 텄다. 이 후보의 지지율이 정체를 피하지 못하자 극약 처방이 나온 것이다.

올해 대선을 놓고 사상 최악의 비호감 대선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순기능도 있다. 대선을 촉매제로 정치 세력의 교체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일궈 낸 국가다. 산업화 세력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는 민주화 세대의 퇴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3년 감옥 가고, 30년 편하게 산다”는 비판은 86세대 정치인들에게 비수다. 대통령 직선제를 끌어낸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해가 1987년이고, 민주정부 1기로 평가받는 김대중정부가 출범한 것도 1998년이다. 86세대들은 충분히 오래 했다.

하윤해 정치부장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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