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디그 여왕 “시합하며 수만번 몸 던졌죠”

국민일보

1만 디그 여왕 “시합하며 수만번 몸 던졌죠”

[인터뷰] 여자배구 역대 최고의 리베로 김해란

입력 2022-01-27 04:05 수정 2022-01-27 17:16
흥국생명 리베로 김해란이 지난 20일 경기도 용인 기흥구 흥국생명연수원 내에 위치한 체육관에서 배구공을 들고 촬영에 응했다. 김해란은 지난 15일 IBK기업은행전에서 V리그 남녀부 통틀어 사상 첫 1만 디그 기록을 세웠다. 용인=이한결 기자

1995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소녀의 키가 165㎝였으니 배구부 코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마침 “공부가 너무 싫었”던 학생은 예체능을 좋아했다. 피아노도 쳐보고 한국무용의 학춤도 춰봤지만, 예능보단 뛰노는 체육이 잘 맞았다. “배구 한 번 해볼래.” 코치의 제안에 “네, 할래요”라고 답했다. 이후 27년간 원 없이 코트를 누볐다. V리그 최초 ‘1만 디그’ 대기록을 작성한, 살아있는 전설 김해란의 이야기다.

경기도 용인 기흥구 흥국생명연수원에서 지난 20일 김해란을 만났다. 2019-2020 시즌 후 출산을 위해 은퇴를 선언한 그는 이번 시즌 흥국생명에 복귀해 지난 15일 1만 디그 고지를 밟았다. “경기에 져서 아쉽지만 영광스러운 기록이라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어요.”

디그는 상대 공격을 받아내는 수비 기술이다. 삽으로 흙을 퍼내듯 팔을 퍼 올려 막는 경우가 많아 디그(dig·땅을 파다)라는 이름이 붙었다. 날아오는 공의 방향과 착지점을 순식간에 예측하고 몸을 날려 받아내야 하니 순발력이 필수다. 수비 전문 리베로의 핵심 역할이다.

그의 특기인 디그 자세를 취하는 모습. 용인=이한결 기자

어릴 적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하지만 키가 더 크지 않았고 2002년 실업배구단 입단 직후 수술로 당시 감독이 리베로로 전향시켰다. “한송이랑 입단 동기예요. 송이는 레프트라 많이 주목받았고 리베로는 티 안 나는 자리라 어릴 땐 섭섭한 마음이 좀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제 자리가 좋았어요.”

김해란은 리베로 전향 후 26일 현재까지 1만16회의 디그로 ‘반격의 기회’를 만들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 김해란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학생 때 새벽-오전-오후-야간 4번, 밥 먹고 운동만 했어요. 언니들, 선생님들한테 혼나기 싫어서 열심히 했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힘들게 해서 잘 버텨온 거 같아요.” 15년간 부동의 국가대표 리베로로 2012 런던올림픽 4강, 2014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일궜고 V리그 10주년 올스타 리베로 등 굵직한 역사를 썼다.

화려한 이력 뒤편에서 김해란은 묵묵히 수만 번 몸을 던졌다. “훈련 때는 시합보다 2배 이상 몸을 던지지 않았을까요.” 발목 2번, 무릎 1번, 팔꿈치 1번 수술을 받고 재활할 때도 묵묵히 버텼다.

“(2015년) 무릎 수술하고 트레이드됐어요. 아픈데 트레이드까지 되니 상처도 컸죠. ‘무조건 복귀’만 생각했어요. 병원에서 재활기간을 1년 잡았는데 5개월 만에 복귀했죠.” 복귀 시즌 V리그 한 경기 개인 최다 디그 54개를 기록했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은퇴를 선언할 땐 다시 코트로 올 줄 몰랐지만 주변의 바람은 달랐다. 예상보다 빨리 아이가 생기자 기다렸다는 듯 “언제 복귀해” 하고 물어왔다. 팬들도 SNS로 ‘복귀 기다린다’고 했다. “너무 많이 들으니까 ‘복귀해야 하나’ 했죠. 그러다 감독님이 ‘다시 도전해볼래’ 제안하셨죠.”

선수의 몸으로 돌아가려고 20㎏ 감량했다. “1년 쉬었는데 예전 실력이 나올까 걱정이 많았어요. 근데 막상 코트에 서니 좋았어요. 이 생활이 행복해요.”

축구선수 출신인 남편 조성원 보은상무 코치는 가장 가까이서 김해란을 지지하는 멘토다. 아들 하율군은 엄마가 안 보여도 잘 안 운다. “처음엔 섭섭했는데 운동하기엔 좋더라고요. 효자예요.” 부상을 달고 사는 딸이 빨리 은퇴하길 바랐던 친정엄마는 육아를 맡아준다. “‘다시 일하면 도와줄 거야’ 물었더니 ‘알겠다’ 했는데 그게 복귀일 줄 모르셨죠. 그래도 제가 하려는 걸 절대 반대하지 않으세요.”

흥국생명은 김연경의 해외진출, 쌍둥이 자매 이탈 등으로 리빌딩 중이다. “제가 장난치면 무섭나 봐요. 애들이 웃긴 하는데 편안함이 없어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 한국 역사상 최고 리베로는 존재만으로 후배들에게 힘이 된다. “(김)다솔이는 가끔 편하게 ‘해난(해란)이 힘내’라고 해요. 전 좋거든요. 후배들이 남친 얘기도 해주면 좋겠어요.”

항상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코트에 선다. “선수 생활을 오래 해서 매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요. 후배들이 경험을 쌓아 성장하면 다음 시즌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용인=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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