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당신이 장애인을 볼 수 없는 이유

국민일보

[한승주 칼럼] 당신이 장애인을 볼 수 없는 이유

입력 2022-04-06 04:20

대중교통 이용 불편해 장애인 돌아다니기 힘든 나라…
올해 교통약자 이동권 예산도 삭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는
이동권 보장과 예산 편성 요구한 것
사회적 약자 배려·국민 통합 내건 윤석열정부는
말만 하지 말고 인프라 예산 반영해야

‘당신이 일터에서 우리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 없거나 고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버스나 기차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접근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당이나 극장에서도 우리는 같은 이유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어디에서 보았는가.’

미국의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75)은 최근 출간된 자서전 ‘나는, 휴먼’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미국에서 장애 인권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하고, 평생을 장애인권법 제정을 위해 투쟁한 인물이다. 그의 글을 인용한 것은 요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장애인 시위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시민을 볼모로 하는 불법 투쟁” “비문명적 방식”이라고 하는 바람에 더욱 국민적 관심을 끌게 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 말이다. 이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장애인이 버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편하고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한 예산을 편성해달라는 요구다.

출근길 지하철 시위는 지난해 12월 시작됐지만 이들의 투쟁은 2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용 리프트 추락 사망 사고가 계기가 됐다. 2002년 발산역에서 같은 사고가 나자 이들은 39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4년까지 서울 지하철 전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도 변화는 없었다. 고 박원순 시장은 2022년까지 모든 공사를 완료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 말 기준 서울 지하철 역사 284곳 중 22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해도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간격은 휠체어 장애인에게 또 하나의 큰 걸림돌이다.

버스는 어떤가. 휠체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턱이 없는 저상버스가 필요하다. 2020년 기준 전국의 저상버스 비율은 30%가 안 된다. 시외·고속버스 중에는 저상버스가 거의 없다. 장애인 콜택시는 숫자가 부족해 보통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 매우 불편하다. 한 번 이동하려면 너무 힘들어 집 밖으로 잘나가지 않는다. 일상에서 그들을 쉽게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이들은 시위를 시작했다. 시민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서도 단지 지하철을 타는 삶이 부러웠다고 말한다. 나도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싶었다, 장애인으로 산다는 게 정말로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런 이들에게 당신들의 요구가 아무리 정당한 것이어도 출근길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이런 방식은 안 된다고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귀 기울이지 않았던 우리 사회에 책임이 있는 건 아닐까. 이들이 처음부터 지하철로 간 건 아니다. 예산 편성을 요구하며 기획재정부 앞에서 80여 차례 시위를 했으나 그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국의 가장 큰 고속버스 회사 그레이하운드는 2001년 이후 제작된 모든 버스에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했다. 영국과 독일 대부분의 버스는 저상버스다. 이들 나라에선 길에서 장애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가고 싶은 곳을 간다. 장애인의 90% 정도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이다. 누군가에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교통 편의를 위한 인프라와 시스템을 갖추는 것을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비용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회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복지로 봐야 한다.

지난 21년 동안 어떤 정부도 장애인 차별 철폐와 장애인 권리 보장이 중점 과제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책임 있게 예산 반영을 하지 않았던 게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 저상버스 도입 등을 포함해 장애인 이동권을 지키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최근 출근길 시위 현장을 직접 찾아 이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국토교통부가 요청한 ‘교통약자 이동권’ 예산 중 30%인 약 400억원을 삭감했다. 정부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국민 통합 정부가 되겠다는 윤석열정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검토만 할 게 아니라 결정해야 할 시간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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