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정책에는 저작권이 없다

[국민논단] 정책에는 저작권이 없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

입력 2022-04-11 04:05

“청와대에 들어와서 보니 이 정부의 구석구석에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창조적인 것이라고, 내가 처음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들어가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런 것이 한두 개가 아니고 상당히 많습니다.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모든 것은 대개 한 번씩 손질을 해두었더군요. 정치의 천재 DJ가 아니라 정책에 있어서도 천재성을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기 후반에 노무현 대통령은 이야기했다. 그저 전임 대통령에 대한 공치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일하던 필자에게 노 당선인 측의 누군가가 물어왔다. “새로운 국정 과제가 될 주제들을 정리해 줄 수 있겠느냐?” 내 답은 이랬다. “새로운 건 없습니다. 이미 김 대통령이 시작한 일들을 진전시키면 됩니다.” 정권 재창출이 된 마당이라 그리 말할 수 있기도 했겠지만,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야 간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정부에서도 그렇게 의료보험을 통합하고 복지체계를 정비하고 정보 강국의 큰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당선인은 최근 ‘문재인정부가 한 일 가운데 잘된 일은 진전시키고 일부는 개선 보완하겠다’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도 같은 맥락에서 전 정부가 하던 것은 ‘무조건 안 돼(anything but)’ 같은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0.7% 포인트 박빙 승리의 효과이건, 거대 야당이 존재하는 여소야대 정국을 헤쳐 나가기 위한 전술이건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과거를 부인하는 데 골몰하다가 뒤늦게 새로운 길은 없다는 걸 깨닫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면야.

모든 대통령은 새로운 길을 내고자 한다. 정치라는 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기에 그런 소망은 당연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씨앗을 뿌리고 미처 그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떠나고, 누군가는 새 길이라고 가다 보면 전임자가 심은 씨앗이 싹을 틔운 걸 보게 된다. 때로는 좋은 씨앗이 심어졌는데 제대로 돌보지 못해 엉뚱한 결과를 낳는 일도 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는 ‘우체통 (사이의) 거리마다 탁아소(어린이집)를 설치하겠다’는 공약을 했다. “왜 우체통 거리마다 입니까?”라는 질문에 김 후보는 “부모가 아이를 안거나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탁아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공약은 10여년 뒤 민주당의 무상보육·무상급식·무상의료라는 3대 무상 시리즈의 하나로 이어졌다. 무상급식을 둘러싼 여야 간 논쟁 속에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무상보육 공약을 내걸었다. ‘무상은 안 된다’는 그간의 입장을 뒤집은 것이었고, 정책에는 저작권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다만 시설과 인력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무상보육 정책의 시행착오와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됐다. 몇 년 뒤 이른바 ‘유치원 3법’이 개정된 이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대표 정책인 청계천 복원 사업은 전임자였던 조순, 고건 시장 재임 중 진행된 서울시 생태환경 조사에 뿌리가 있다. 몇 년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남산에서 용산을 거쳐 한강으로 이르는 물길 회복과 청계천 복원 같은 제안이 거기 담겨 있었다. 김대중정부에서는 한강 등 4대강의 수질 관리를 위해 4대강 법이 제정됐다. 강 상류와 하류에 관한 의견이 다르고, 오염원 배출자와 물 사용자의 이해가 상충돼 합의안을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렸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자 방향을 바꿔 국회에서 몸싸움을 벌여가며 4대강 법 개정안을 밀어붙였다. 수십조원을 들인 대규모 토목공사는 어떤 설득 과정도, 식수로 사용되는 강물에 대한 주의 깊은 접근도 없이 진행됐다. 그렇게 4대강 법을 뿌리부터 흔든 4대강 사업은 수질 악화 우려가 높고 경제성은 극히 낮다는 감사원의 지적을 받았다. 결국 이미 훼손된 생태계 회복에 얼마나 걸릴지는 큰 숙제로 남았다.

새 대통령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할 수 있다. 다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역사의 맥락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부담은 5년 유한 책임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지게 된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