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함부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말하지 말라

국민일보

[고승욱 칼럼] 함부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말하지 말라

입력 2022-04-13 04:20

대권 잠룡 광역단체장 도전은
정치인의 자연스러운 선택

그러나 윤심·명심 앞세우고
대선 연장전에 나선 정치권

유권자 선택 강요하지 말고
지방자치 의미 다시 생각해야

미국 대통령 중에는 주지사 출신이 많다. 역대 48명 중 19명이나 된다. 조지 W 부시, 빌 클린턴, 로널드 레이건, 지미 카터는 주지사를 마치고 대통령 선거로 직행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욕에서, 우드로 윌슨은 뉴저지에서 주지사로 일했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도 버지니아 주지사에서 출발했다.

미국인들은 주지사의 대통령 출마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주지사 자리는 지역의 명망가가 전국적 인물로 자신을 알리는 디딤판이다. 정치적 의미는 거기까지다. 상원의원, 연방정부 장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도 전국적 정치인으로 데뷔하는 통로이긴 마찬가지다. 도널드 트럼프처럼 TV에 부지런히 출연해도 된다. 대선이 있던 2016년 초 갤럽은 미국 성인의 72%가 주지사 경험이 유능한 대통령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주지사 출신이 유권자나 당원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2006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에서 주지사 출신 9명이 경선에 나섰는데 아무도 빅5에 들지 못했다. 민주당에서도 메릴랜드 주지사 출신 마틴 오말리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일단 광역시장과 도지사는 잠룡 반열에 오른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차기를 묻는 여론조사에 포함된다.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는다고 짐짓 불평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는 자리다. 사실 광역단체장은 당에서 요직을 섭렵한 중진의원의 다음 선택지로 안성맞춤이다. 갑자기 명성을 얻은 뒤 정치인으로 변신해 업그레이드 하기 좋은 자리이기도 하다. 서울은 첫 민선이었던 조순 시장이 대권 도전의 길을 텄고, 이명박 시장이 성공했다. 인구가 서울보다 많은 경기도는 조금 달랐다. 이인제 지사를 선두로 손학규·김문수·이재명 지사가 줄줄이 실패하면서 ‘잠룡의 무덤’이 됐다. 경남도는 직을 상실한 김경수 지사를 제외한 역대 도지사 전원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충청 대망론의 충남지사, 호남 역할론의 전남지사도 단골 후보다.

유권자 입장에선 어떨까.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을 서울 시민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뿌듯한 기분도 들고, 서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정책이 나오리란 기대도 있다. 지방으로 가면 훨씬 더하다. 수도권을 제외한 광역단체장은 대부분 고향이 그 지역이다. 미국에서처럼 지역 주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대권으로 향한다. 그게 국민과 지역 주민에게 봉사하겠다는 정치인과 그 선의를 받아들이는 유권자의 상식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국의 정치인들은 이 상식의 선을 넘었다. 물론 1995년 이후 27년이 지나도록 지방자치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재정 자립이 요원해 중앙정부에 돈 달라고 매달려야 하는 처지다. 지방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부패는 갈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이를 견제할 장치는 보이지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선-총선-지방선거로 계급화된 권력 선출 시스템의 탓도 무시할 수 없다. 출발점인 지방권력 선출 과정부터 문제가 심각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민선 단체장 이전에는 대통령이 시장과 도지사를 골랐다. ‘서울’에서 임명장 받고 ‘시골’에 부임한 ‘원님’은 관사에서 ‘토호 세력’과 적당히 타협하며 훗날을 도모했다. 지금은? ‘윤심(尹心)’과 ‘명심(明心)’이 후보를 정한다. 지역 주민에게는 ‘새 정부 힘 실어주기’와 ‘이재명 살리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대선은 끝났지만 선거는 끝난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가장 큰 이슈는 검찰개혁이다. 검찰 수사권 박탈이 동네에서 아이를 잘 키우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아예 설명하지도 않는다. 예비후보 등록을 앞두고 황급히 주소지를 바꿔도 변명조차 없다. 우리 편 승리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니 받아들이라는 식이다. 당선돼도 임기가 얼마가 남았든 다른 기회가 생기면 주저 없이 떠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입으로는 자치와 분권을 말한다. 제헌헌법에 담긴 지방자치 정신이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어떻게 훼손됐는지를 따진다. 그러면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외친다. 도대체 그 머릿속에 있는 지방자치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자치단체는 누군가의 성공을 위한 정치 연수원이 아니다. 자치단체장, 지방의원, 교육감에게는 저마다 할 일이 있다. 그 할 일이 무엇인지는 여의도에 있는 정당이 아니라 지역 주민이 결정한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