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구실 못하는 민방위 대피소… 잠깐의 평화에 손놓은 정부 [이슈&탐사]

국민일보

제구실 못하는 민방위 대피소… 잠깐의 평화에 손놓은 정부 [이슈&탐사]

[유리벙커] <③·끝> 갈수록 부실화하는 전국 대피소

입력 2022-04-20 04:04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역삼1동 역삼지하보도 진입로. 역삼지하보도는 민방위 대피소로 지정돼 있지만 일반 성인이 걷기에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진입로가 가팔랐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인 등을 위한 진입보조시설도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아 유사시 원활한 피신이 어려울 듯했다. 이동환 기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도심에 진공폭탄이나 백린탄 등 대량살상무기를 퍼부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이 유사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까. 전문가들은 현재 구비된 민방위 대피소로는 제대로 대비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시설을 안보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민방위 관련 조직·예산을 확보해야 하지만 정작 계속 줄어드는 실정이다. 전시 행동 요령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끌어올리는 일도 난제다.

전쟁 안 난다고 부실한 채로 둘 건가

민방위 관련 조직과 예산이 줄면 자연스럽게 대피소 관리는 힘들어진다. 김태환 용인대 경호학과 교수는 “민방위기본법이 그동안 전시체계에서 일반 재난체계로 바뀌었고 민방위 관련 부처 규모도 축소됐다”며 “우크라이나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민방위를 제대로 조직할 수 있을지 의문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피소는 지정만 해놨지 관리가 안 되고 있다”며 “이래서는 주민들도 (전쟁 등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희생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신상영 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바쁜 공무원들이 서울에 포격이 실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대피소까지 제대로 보완하기 쉽지 않다”며 “상황이 일어나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가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관계 부처는 적은 인력과 예산으로 모든 사각지대를 해소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행정안전부 민방위심의관실 예산은 시설·장비사업 161억4900만원, 교육·훈련사업 53억8700만원으로 모두 215억3600만원이었다. 행안부 전체 예산 57조4451억원의 0.04%도 안 된다. 이 돈으로는 기존에 보유한 시설과 시스템을 유지·보수하기에도 빠듯하다고 행안부 담당 부서는 하소연한다.

한 관계자는 “공습경보에 쓰이는 사이렌 경보 시설이 노후한 상태”라며 “350만 민방위 대원이 입어야 하는 민방위복도 방염·난연이 안 돼 있어 화재에 취약하고 현장 활동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방독면도 부족하다. 그는 “이런 시설과 장비 성능을 높이려면 예산 투입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다른 관계자는 “전시 행동 요령에 대한 매뉴얼도 다 갖춰져 있고 제도나 절차엔 문제가 없지만 적은 인원으로 여러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읍·면·동 공무원을 동원해 민방위 시설 관리자들을 교육하는 부분에선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전국 대피소들을 모두 접경지역처럼 요새화하면 좋겠지만 경제성이나 예산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바람직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서울시 건축심의위원을 맡고 있는 김태환 교수는 “새로 짓는 아파트 주차공간에라도 식수나 비상용품을 갖춰두자고 계속 말하는데도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아 비용 문제 탓에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시·도·구별로 적어도 하나씩이라도 화생방에 대비할 수 있는 방공호를 구축해 놓으면 제대로 갖춰진 대피시설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태구 세명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환기장치나 구조물을 기본으로 갖춘 기존 아파트에 방폭문, 비상 화장실, 비상 발전기 등을 보강하려면 주민이 100명일 경우 1인당 200만~300만원씩 부담하면 된다”며 “정부가 어느 정도 지원만 해준다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부·정치인 무관심이 민방위 구멍 키웠다


전쟁이 나면 어디로 어떻게 피해야 할지에 대한 국민 인식은 현저히 떨어진다. 지난해 6월 서울연구원은 온라인 설문 방식으로 만 15세 이상 서울시 거주자 1000명에게 동네 대피시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10명 중 6명(58.4%)은 모른다고 답했다. 재난을 가정한 모의훈련 등을 통해 대피시설을 이용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75.9%가 “없다”고 했다.

민방위 교육시간도 줄고 있다. 1980년대까지 1년에 최대 30시간을 받던 교육은 1989년부터 연 8시간으로 줄었고 2000년 이후에는 민방위 연차에 따라 1~4시간으로 단축됐다.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인 2020년 하반기부터는 모든 연차 1시간 사이버교육으로 대체됐다. 헌혈증을 내면 이마저도 면제다. 전국 단위로는 매년 1차례 진행하는 민방위 훈련도 코로나19 확산 우려 때문에 2년반 동안 못했다.

교육의 질도 문제로 지적된다. 민방위 2년차인 회사원 정모(32)씨는 “민방위 교육은 구체적으로 전쟁 시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내용만 소개한다”며 “교육 수료를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은 인터넷에 답안이 돈다”고 말했다. 그는 “차라리 대피요령과 안전수칙을 전 국민에게 문자나 편지로 발송하는 게 효과적일 것 같다”고 했다. 3년차 대원인 회사원 장모(34)씨도 “교육 영상을 틀어 놓기만 하고 제대로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며 “헌혈로 면제되는 건 취지랑 관계없는 이상한 정책인 듯하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유사시 대응력 확보’라는 원론만 앞세워 교육·훈련을 강행하기도 쉽지는 않다. 교육에 참여하려면 어떤 사람은 그날 벌이를 포기해야 하는데 이로 인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민방위 교육 시간을 줄여온 배경 중 하나다.

행안부 관계자는 “어느 정도 교육을 해야 적정한지 지속해서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라며 “(코로나19 방역 완화 등으로 볼 때) 전국 단위 훈련은 이제 재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제임스 김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안보 같은 공공재 영역에서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제공하고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게 정부의 기본적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명확한 안보 위협이 있는데도 민방위 대피시설이 전시에 제대로 활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 정보조차 부족한 건 행정부나 정치인들이 그동안 신경을 안 썼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이슈&탐사팀 강창욱 이동환 정진영 박장군 기자 huan@kmib.co.kr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