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하루 끝의 진입로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하루 끝의 진입로

이다울 작가

입력 2022-05-02 04:07

엄마는 어린 나를 재우기 위해 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동화책을 한 움큼 뽑아 엄마에게 내밀었고 하루라도 읽어주지 않으면 떼를 썼다. 엄마는 그런 나를 염려했다. 그 염려는 육 년 일찍 태어난 나의 형제로 인한 것이었다. 그 역시 엄마의 낭독을 들으며 잠이 들었고 한글을 거의 다 깨친 후에는 스스로 읽는 재미에 깊이 빠졌다. 책에 직접 코를 박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생애 첫 안경을 맞추었으며 그의 눈과 입은 언제나 손과 발보다 빠르고 바빴다.

아들의 말재간에 당해낼 여력이 없던 엄마는 그의 손발이 게으른 이유를 마침내 책으로 꼽았다. 결국 내게는 책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시키고자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도 정해진 날에만 책을 읽어 주었다. 그러나 내게도 한글을 깨우칠 날은 여지없이 등장했고 내 형제와 마찬가지로 책에 몰두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 또한 그처럼 손과 발이 느리고 게을렀으나 책을 탓할 만큼의 훌륭한 말재간을 구사하진 못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글뿐 아니라 국어를 배울 무렵, 내 공간은 베란다에서 온통 핑크색 벽지로 둘러싸인 실제 방으로 옮겨갔다. 핑크색 벽지에는 머리가 세 갈래로 나뉜 튤립요정이 그려져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언제나 대여섯 권의 책이 있었고 자다가 책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잠들기 전 읽는 책은 세상일을 잊기 좋은 수면유도제와 같았다. 또래 남자애가 실내화 가방을 휘두르며 위협하던 날을 잊기 좋았고, 종종 친구들이 나를 따돌리는 것 같은 기분을 잊기 좋았고, 형제에게 까불다 결국 얻어맞던 시간을 잊기 좋았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에 깨어 책을 읽다 보면 가슴팍에 철썩철썩 차가운 물이 끼얹어지는 것 같았다. 형제도 그랬을까? 그러한 향수 때문에 나는 언제나 그 가슴 시린 감각을 복원하고 싶어한다. 하루의 끝으로 향하는 꿈으로의 유서 깊은 진입로를 영영 그리워하며 살듯싶다.

이다울 작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