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우리끼리 식사는 혼밥과 다를 게 없다

국민일보

[고승욱 칼럼] 우리끼리 식사는 혼밥과 다를 게 없다

입력 2022-05-11 04:20

같이 밥 먹는 것은 대화 나눌
자세 됐음을 알리는 프로토콜

'윤석열표 식사 정치' 정치권
관행과 다른 소통의지 보여줘

우리 편 뛰어넘는 자리 만들어
진영 아우르는 통합 이뤄야

“밥 한 번 합시다.” 참 많이 쓰는 말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든,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옛 친구든 헤어질 때 꼭 하는 인사말이기도 하다. “조만간 봅시다”라고 답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말 나온 김에 약속을 정한다. 조금이라도 일과 관련됐다면 대부분 그 자리에서 빈 날짜를 찾는다. 우리 사회에서 밥을 같이 먹는 것은 대화를 나눌 자세가 돼 있음을 알려주는 프로토콜이다. 생업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기본 수칙이다. 그러니 사람 관계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게 본업인 정치인에게 식사를 함께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혼밥하지 않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간결한 선언은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박근혜정부를 거치면서 대통령의 혼밥은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불통과 같은 뜻으로 사용됐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상공부 장관 시절 식사 대접을 받지 않겠다고 도시락을 들고 출근했다지만, 그건 자유당 때 미담에 불과하다. 혼밥은 대통령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다. 2018년 12월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혹시 혼밥하시지 않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질문은 진심이 담긴 걱정이었다.

지난해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그만두고 여의도 문법을 익히면서 보여준 행보는 전형적인 ‘식사 정치’였다. 언론에 보도된 오·만찬 기사만 훑어봐도 검찰청 문을 막 나선 정치 신인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고, 갈림길은 어디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다. 그는 처음 3개월은 정치권과 거리를 둔 채 학자와 각계 전문가를 주로 만났다. 그러다 입당을 앞둔 6월 하순부터 정진석 국회부의장, 권성동 원내대표 등 국민의힘 중진의원들과의 식사 자리가 기자들의 레이더에 포착됐다. 그 무렵 윤 대통령이 만나 밥을 같이 먹은 인사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 권영세 통일부 장관 후보자, 김영환 충북도지사 예비후보, 오세훈 서울시장, 하태경 의원 등이다. 이들은 지금 신문 1면 뉴스의 주인공이다.

외곽에 머물던 정치인이 주요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식사 정치’에 나서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은 지난해 초 경선을 앞두고 경기도지사 공관과 여의도에서 의원들과 식사하며 당내 기반을 다졌다. 한동안 칩거했던 유승민 전 의원이 2020년 말 정치권 인사들과 식사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포착되자 많은 기자들이 그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여부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통상적인 여의도의 식사 정치와 조금 달랐다.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을 푼 매개체로 치맥과 불고기가 소개됐고, 안철수 대표와의 만남에서도 음식점 이름이 만남의 내용보다 더 회자됐다. 밥을 먹으면서 담판을 했다. 프로토콜이 피날레로 가기도 했다. 지난 3월 대선이 끝난 뒤 당선인 자격으로 보여준 식사 정치에 관심이 집중됐던 이유다. 김치찌개, 꼬리곰탕, 짬뽕, 파스타, 육개장 같은 메뉴가 과하게 소개됐고 번개 오찬, 도시락 만남, 샌드위치 회동이라는 번잡한 말이 포장지로 사용됐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얼굴에는 기대가 담겨있었다. 부담 없이 밥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심지어 꽉 막힌 일의 결론까지 내릴 수 있는 대통령. 5년 전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전임자가 하지 못했던 바로 그 일을 할 대통령. 윤 대통령이 소통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런데 아직은 기대하는 것까지다. 윤 대통령의 식사 정치는 ‘우리 편’ ‘우리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편 가르지 말고 통합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뜻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제시한 새 정부의 핵심 기조 역시 국민 통합이다. 지금까지는 국민의힘 후보,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기에 같이 밥 먹는 사람이 정해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비록 취임사에 통합이라는 말은 빠졌지만 진영, 세대, 계층을 뛰어넘는 ‘윤석열표 식사 정치’가 통합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길 바란다. 지난 3월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꼭 한 번 식사 자리 모시겠다”고 했던 약속부터 하루빨리 지켰으면 좋겠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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