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북한 어린이는 살리고 보자

국민일보

[여의춘추] 북한 어린이는 살리고 보자

고세욱 논설위원

입력 2022-05-20 04:08

2001년 6월 평양의대를 방문했다. 한 시민단체가 북한어린이돕기 일환으로 평양의대와 평양 제1인민병원에 의료기기를 전달했는데 취재기자로 동행했다. 평양의대는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의대다. 북한에서 가장 좋은 의료기관이다. 하지만 평양의대 이비인후과 외래실에서 느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녹이 잔뜩 슨 의료 장비들, 해진 의사 가운, 고장 난 분무기에 내시경도 없었다. 기억을 되살리려 당시 기사를 들췄더니 안과에는 안약과 마취약도 없었다고 쓰여 있다. 함께 간 의사들은 “이렇게 시설이 열악할 줄 몰랐다” “저런 기기라면 없는 게 차라리 낫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북한이 최근 코로나19 확산을 공식 인정했다. 지난달 말부터 19일까지 발열자 수가 200만명에 달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건국 이래 대동란’이라고 표현했다. 6·25를 동란이라고 부르는데 대동란이면 어느 정도일까. 그동안 전 세계가 코로나 홍역을 치를 때 북한은 스스로 ‘코로나 청정지대’라며 우쭐댔다. 북한의 열악한 의료 현장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뒤늦은 북의 실토를 보면 “지금까지는 확진을 은폐해오다 예상을 넘은 확산세에 두 손 들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의 한 약국을 찾는 사진에 시선이 꽂혔다. 어두컴컴한 길을 몇몇 군인들이 손전등으로 비추며 김 위원장을 약국으로 안내하고 있는 장면이다. 최고 존엄이 수도 평양에서 가로등도 아닌 손전등에 의지해 길을 걷고 있다. 21년 전과 달라진 게 너무 없어 놀라울 뿐이다. 당시에도 전력이 부족해 저녁 평양 거리는 컴컴했다. 평양의대 의사들이 가장 반긴 선물이 정전에 대비한 배터리 충전기였다. 20여년간 전력난도 해소 못 했는데 의료환경이 나아졌겠나. 지난해 기준 세계 보건안보지수에서 북한은 195개국 중 193위였다. 백신은 거부하면서 치료법이랍시고 버드나무 잎과 우황청심환, 꿀이 등장한다.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의료국의 최대 피해자는 어린이다. 북한 매체에 따르면 코로나 사망자 중 10세 미만 어린이 비중은 16%로 61세 이상(34%) 다음으로 많았다. 어린이 사망자 비중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다. 평양의대 외래실에서 불결한 장비로 치료받으며 울던 어린이가 떠올랐다.

윤석열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돕기 위해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제의했다. 윤 대통령의 대북정책 하면 상당수가 ‘선제타격론’을 먼저 떠올린다. 그래서 대통령의 첫 대북 메시지가 방역 지원이라는 것에 의외라는 이들이 적잖다. 코로나 사태에도 아랑곳없이 핵실험에 분주한 북한을 왜 돕냐는 반론도 있다. 이해되기는 하지만 비핵화에 대한 압박과 인도적 지원은 별개로 진행하는 게 맞다. 전쟁을 해도 적국의 민간인을 공격해선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제대로 된 마스크도 없이 원시적 치료법에 의존한 북한 주민에게 남한의 온정이 어떻게든 미치도록 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우리의 호의를 계속 외면하더라도 지원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한다.

미국 외교가에는 ‘오직 닉슨만이 중국에 갈 수 있었다(Only Nixon could go to China)’는 경구가 있다. 1970년대 강경 보수주의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동서 진영의 데탕트와 미·중 수교로 이어진 데서 나온 말이다. 통상 우파 지도자가 지지층이 반대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할 때 결과가 좋다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나라에선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이 대표적이다. 육사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대북 화해 정책 및 공산권 수교를 강력히 추진했다. 반공 분위기가 강했던 당시 보수 대통령의 역발상은 보수층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진보의 지지도 얻었다. 대북정책의 공감대가 형성되자 임기 중 남북기본합의서, 지방자치제법 등 상당수 법안이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현 정부가 인사에서 놓친 협치를 정책을 통해 살리고 싶다면 북한 코로나 사태가 제격일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구하고 보자는 인도주의 정신에 여야가 입장이 다를 순 없다. 남북에 소통의 공간이 조금이라도 열려야 문제의 실마리가 풀린다. 윤석열정부의 대북 제안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평양의대에서 본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작고 깡말랐다. 지금은 청년이 됐을 그들이 남한 마스크를 쓰고 남한이 건네준 백신을 맞으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