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화장지가 뭐라고

국민일보

[뉴스룸에서] 화장지가 뭐라고

조민영 온라인뉴스부 차장

입력 2022-05-23 04:08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는 지난 4월 서울 서초동 자택 앞에서 루스핏 후드 티에 와이드 청바지, 슬리퍼 차림으로 경찰특공대 폭발물 탐지견과 찍은 사진 한 컷을 SNS에 올렸다. 대선 과정에서 이른바 ‘자숙 기간’을 보냈던 그가 선거가 끝난 뒤 대중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첫 행보였다. 사진 속 김 여사의 이미지는 매우 자연스러웠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진이 아무런 연출 없이 우연히 찍힌 결과물이었을 리는 없다. 탐지견과의 한 컷을 선택한 건 영부인이 될 신분의 변화를, 느슨히 머리를 묶은 민낯에 놀라울 만큼 캐주얼한 패션은 수수한 이미지와 검소함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사진 공개 후 그가 신었던 슬리퍼는 3만원대에 온라인상에서 판매되는 제품으로 알려지며 순식간에 완판됐고, 지지자들이 환호했던 것을 보면 그날 김 여사의 사진 픽(pick)은 일단 전략 성공으로 보였다. 이후 김 여사 행보는 어김없이 의상이나 소품 등 패션 이야기로 흘렀다. 시각적 이미지가 어느 것보다도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되니, 정치에서도 패션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취임식 같은 공식 행사에서 무엇을 어떻게 입는지에도 메시지가 담기기 마련인데 남성 대통령에 비해 여성인 영부인의 패션 아이템이 선택의 폭이 넓다 보니 ‘패션 정치’는 중요한 정치적 수단이기도 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유럽 순방을 나섰을 때 부인 질 바이든 여사는 ‘LOVE(러브)’라고 쓰인 재킷을 입고 화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문제는 대중적인 만큼 휘발성이 큰 패션을 정쟁 수단으로 삼으려는 시도다. 문재인 정권 후반부를 가장 크게 뒤흔든 이슈는 대통령 부인의 ‘샤넬 재킷’과 ‘표범 브로치’였다. 두 논란은 결과적으론 별다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채 명품 브랜드와 엮어 부정적인 사치 이미지를 얹는 데만 주력하면서 갈등의 골만 키웠다. 이를 의식한 듯 김 여사는 유독 검소한 패션 아이템이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지난 10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직접 산’ 영세한 소상공인의 옷을 입은 것은 전 영부인의 과거 논란과 차별화하려는 의도도 깔린 것으로 해석됐다.

이에 더해 최근 김 여사의 팬클럽 회장인 강신업 변호사가 “팬클럽 회원이 보낸 5만원짜리 검정색 안경을 끼고도 태가 난다”며 또 한 번 김 여사의 ‘검소 이미지’를 공개했다. 그런데 이는 때아닌 화장지 논란으로 이어졌다. 사진 속 한 귀퉁이에 찍힌 ‘노란색 화장지’가 사실은 고가의 수입 화장지라는 지적이 나오며 공방이 벌어진 것이다. 패션과 이미지 자체를 정쟁 도구로 삼으려다 역공당한 사례다.

정치가 패션이나 외모로 소비되는 건 김 여사만은 아니다. 최근 ‘한동훈 현상’이라는 조어까지 등장시킨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향한 대중의 관심도 후자에 가깝다. 그가 쓴 안경테나 스카프, 서류 가방, 넥타이 등 장관의 자리나 역할과는 무관한 지점에서 폭발하고 있다. 대중의 관심은 정치적 지지라기보단 팬덤에 가깝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정치적 행보에 대한 동의 여부와 별개로 마음에 드는 이미지에 따라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데 있다.

가장 우려되는 건 이것이다. 대통령의 메시지와 방향성이 가장 주목되는 정권 초기임에도 대통령 메시지는 간데없고 김 여사의 슬리퍼와 화장지, 한 장관의 안경테만 강렬히 각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배우자인 김 여사와 최측근인 한 장관을 향한 대중의 환호를 그저 기뻐할 일인지 냉정하게 돌아볼 때가 아닐까.

조민영 온라인뉴스부 차장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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