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염원’ 국민적 합의에 따라 대한민국 건국

‘자유민주주의 염원’ 국민적 합의에 따라 대한민국 건국

[대한민국, 6·25전쟁 그리고 한국 기독교] 해방 후 남한 사람은 어떤 나라를 세우길 원했나 (3)

입력 2022-06-0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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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대부분 한국인이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1946년 여름 미 군정의 여론조사 당시 한국인들은 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 사회주의 70%를 지지한다고 나타났다는 것이 이들의 중요한 근거이다. 이를 근거로 진보 진영은 해방 후 대세는 좌익으로 기울고 있었고, 미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는 공산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또 보수 진영은 이승만의 반공 투쟁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민주공화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좌우가 다 같이 해방 후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대세였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해방 직후 한국인들은 미국을 소련보다 훨씬 좋아했고, 이승만은 박헌영이나 김일성보다 한국인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우익의 반탁운동은 좌익의 찬탁운동을 압도했다.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월남한 사람이 150만명에 이른다면 거꾸로 남한에서 북으로 넘어간 사람은 불과 13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대다수 한국인은 공산주의보다는 민주주의를 좋아했다. 따라서 우리는 1946년 진행된 미 군정의 여론조사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 군정은 1946년 3월 12일 한국인들의 경제 성향에 대한 조사를 발표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토지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한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남한 사람들도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 남한 사람은 북한식 무상분배를 반대하고, 자본주의 원칙에 입각한 유상분배를 지지했다. 남한 사람들은 유상분배를 통해 토지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분명하게 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설문조사가 시행된 다음 북한의 토지 개혁에 대한 소식이 남한 전역에 알려지게 됐다. 북한의 인민 정권은 일본인과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 분배했다. 이것으로 북한 농민의 70%가 혜택을 입게 됐으며 김일성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고하게 했다. 미 군정은 4월 12일 남한에서도 북한과 같은 토지 개혁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여기에 대해 긍정이 21%, 부정이 73%에 이르렀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식 무상 분배를 원하지 않았다.


당시 미 군정은 한국인들은 어떤 지도자를 선호하는가를 알고자 했다. 따라서 1946년 3월 중순 두 차례에 걸쳐 누가 한국인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인가를 물었다. 여기서 1위가 이승만, 2위가 김구, 3위가 여운형이였다. 그리고 우익 지도자들은 전체의 70%, 좌익 지도자들은 전체의 30%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 군정은 남한에서 우익은 항상 7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봤다.


1946년 7월 미 군정은 약 1만명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한국의 정치와 경제 문제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먼저 정치적인 질문을 보면 남한 사람들은 왕이나 특정 귀족, 혹은 특정 계급이 지배하는 정부보다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대의민주주의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이는 노동자와 농민과 같은 특정 계급이 주도하는 인민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1947년 여름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남한 주민 80% 이상이 삼권분립을 주장했다. 삼권분립은 권력의 견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미국식 제도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소련식 인민위원회와는 다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1946년 여름의 미 군정 여론조사는 세 가지 사상에 관해 물어보고 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지지자는 13%, ‘사회주의’는 70%, ‘공산주의’는 10%, 그다음은 ‘모른다’가 7%였다. 많은 사람은 여기에 근거해 당시 남한 사람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합하면 80% 이상이 좌익이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를 살펴봐야 한다. 당시 한국인들은 자본주의가 개인의 소유를 절대시한다면, 공산주의는 개인의 소유를 완전히 부정하고, 사회주의는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되 공익을 위해서 제한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많은 한국인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부정하고 서로 돕고 사는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북한에서 만든 정당 이름이 ‘사회민주당’이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에 분명하게 서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온건한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이런 경제체제가 완전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바뀐 것은 1954년 제2차 개헌에서였다.

해방 직후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를 지지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1919년 3·1운동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만들기를 원했고 해방 이후 대부분 한국인은 이런 정신을 계승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1948년 이런 국민적 합의에 따라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는데 미군의 역할도 절대적이고 이승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려는 국민적 합의였다.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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