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 추징금 30조 시대… 차명·해외은닉 등 수법 갈수록 진화

국민일보

미제 추징금 30조 시대… 차명·해외은닉 등 수법 갈수록 진화

연 1000억 환수 집행률 0.5% 불과
3자 명의 재산은 법적절차 더 복잡
검수완박땐 추징업무 위축 우려도

입력 2022-06-04 04:10

‘오스템임플란트 2215억원, 우리은행 614억원, 서울 강동구청 115억원….’

최근 기업과 은행, 공공기관 등을 불문하고 거액의 횡령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많게는 수천억원 규모의 횡령 범죄가 이어지자 인터넷엔 ‘천하제일 횡령 대회’라는 제목의 풍자 글까지 등장했다. 네티즌들이 횡령 금액이 큰 순서대로 순위를 매기는데, 새로운 사건이 터지며 하루가 멀다 하고 순서가 바뀐다. 지난달 26일엔 회삿돈 85억원을 횡령한 한국수자원공사 직원이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계양전기 횡령 사건(245억원)에 이어 5위 ‘업데이트’ 됐다. 댓글엔 “연말까지 얼마나 더 늘어날지 궁금하다”는 냉소가 이어졌다.

문제는 신체형 처벌 수위와는 별개로 범죄 수익을 회수하는 길이 무척 험난하다는 점이다. 횡령 등 경제 범죄 형벌은 단순히 수감 생활뿐만 아니라 범죄 수익을 몰수·추징하는 부분까지 포함된다. “범인이 은닉한 수익까지 회수하는 것이 판결의 완성”이란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그러나 “한 탕 챙긴 뒤 (교도소에서) 살고 나오면 그만 아니냐”는 세간의 인식도 팽배하다. 특히 추징금의 경우 납부하지 않더라도 벌금처럼 노역장에 유치되는 등 별도의 제재 수단이 없다. 최근 발생한 횡령 사건 피의자들은 입을 모아 “주식 투자 등으로 모두 써버렸다”고 수사기관에 진술했다.

범죄 수익 환수가 갈수록 힘들어지자 법조계에선 범죄 자체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더불어 수익을 몰수·추징하는 집행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3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법원 판결로 확정된 추징액은 2016년 26조787억원에서 2020년 30조6489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해 말 기준 총 30조9557억원에 이른다. 반면 연간 환수 금액은 1000억원 수준에 그쳐 집행률이 0.5% 안팎에 불과하다. 전체 추징액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 공동 추징금(약 22조9000억원)을 제외하면 실제 환수율은 3% 정도다.


전체 추징금의 약 90%는 100억원이 넘는 고액 사건이 차지한다. 966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채 지난해 11월 숨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전씨는 1997년 대법원 판결로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다. 그의 이름을 딴 ‘전두환 추징법’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25년이 흐른 현재까지 절반가량 미납 상태다. 2015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됐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도 지난해 12월 추징금 7억원을 내지 않았지만 사면됐다.

환수율이 낮은 것은 범죄 수익을 은닉하는 수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명의신탁과 대포 통장, 차명 계좌 등은 기본이고, 해외로 돈을 빼돌리는 경우도 늘고 있어 환수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우리은행 회삿돈 614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A씨 형제는 해외에 자신들 명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50억원을 빼돌린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한 검찰 관계자는 “요즘 세상에 자기 계좌에 돈 넣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웬만한 경제 범죄는 해외 공조 수사가 필수”라고 말했다.

특히 제3자 명의로 된 재산은 민·형사 사안이 함께 얽힌 터라 환수 절차가 한층 복잡하다. 2215억원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오스템임플란트 전 자금관리팀장 이모씨 재판에선 최근 그의 아내 등 가족들이 ‘제3자 참가신청’을 제출했다. 이씨는 앞서 횡령금으로 75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아내와 처제 명의로 사들이고, 갖고 있던 상가 건물도 이들에게 각각 증여했다. 이씨 유죄 판결 시 해당 재산이 몰수될 것을 우려해 가족들이 재산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한 부장검사는 “자금원이 범죄수익이란 걸 입증하더라도 민사상 소유권 말소·채권 청구권 등을 함께 따져야 해 법적으로 까다롭다”고 말했다.

‘검수완박’으로 향후 검찰 직접 수사가 축소되면 추징 업무가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문재인정부 시절 ‘국정농단’ 최순실씨 등의 범죄 수익 환수를 명분으로 서울중앙지검 등 주요 검찰청에 범죄수익환수부가 설치됐는데, 이후 축적된 환수 노하우가 검수완박 시행 후 검찰 수사관에 대한 인력 조정 과정 등에서 일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죄 수익이나 벌금 등을 받아내는 집행 실무는 대부분 검찰 수사관들이 맡고 있다.

법조계에선 최근 가상화폐 ‘루나 사태’ 등 경제 범죄가 첨단화하는 점을 고려해 수사기관의 환수 역량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규모 보이스피싱, 금융 사기 등의 목적은 무조건 돈”이라며 “피해자 보호와 범죄 예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죄에 상응하는 형벌뿐만 아니라 범죄 수익으로 얻은 수익을 모두 환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추징 집행 전담 인력을 증원하고 조직을 정비하는 등 정책 차원의 실효성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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