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나랑 놀래?’ 카톡… 그는 친구 아닌 센터 대표였다[이슈&탐사]

국민일보

한밤중 ‘나랑 놀래?’ 카톡… 그는 친구 아닌 센터 대표였다[이슈&탐사]

[상담시장 X파일] <5화>도와달랬더니 유린②

입력 2022-06-06 04:04 수정 2022-06-06 04:04
출처=픽사베이
자정 즈음이었다. 잘 준비를 하던 채민주(가명·20대·여)씨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날아왔다. 오밤중에 카톡이라니. 무심코 휴대폰을 들어 올려 대화창을 열었다. 헉. 웬 중년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클로즈업 사진 속 그는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채씨를 노려봤다. “나랑 놀래?” 그가 보낸 메시지였다.

그러곤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그 남자는 채씨가 트라우마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심리상담센터의 대표였다. 센터에 갔다가 얼굴을 마주친 적은 있어도 사적으로 대화 한번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다. 자신을 상담해주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흉하고 소름 끼쳤다”며 “그 일 때문에 거의 정신병이 생겨서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고 취재진에게 말했다. 채씨는 성폭행 피해를 호소하며 해당 센터에서 심리상담을 받던 사람이었다.

센터는 이름난 곳이었다. 이곳 상담사는 심리학 등 관련 석박사 학위에 수련(전문훈련) 경험을 두루 갖춘 이들이었다. 게다가 한국여성민우회가 소개한 상담소였다. 번듯한 심리상담센터에서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순전히 실수였다는 게 센터 대표 윤희준(가명)씨의 해명이다. 지인들과 어울리던 술자리에서 친구에게 보내려던 메시지를 술에 취해 채씨에게 잘못 보냈다고 한다.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윤씨는 사과도 없이 카톡 대화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러면 자기가 보낸 사진과 메시지가 대화방에서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때 채씨를 친구 목록에서도 차단했다. 밤중에 내담자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간 또 다른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였다고 윤씨는 말했다.

내 번호가 왜 당신 폰에

내담자를 충격에 빠뜨린 ‘카톡 사건’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윤씨는 입을 꾹 다물었다. 채씨를 담당하는 상담사에게는 물론이고 실질적 운영자이자 대표 상담사인 아내에게도 숨겼다. 이 사건은 채씨가 담당 상담사에게 말하고서야 공식적으로 센터에 알려졌다. 센터장 김수진(가명)씨는 남편과 센터 측 잘못을 모두 인정하며 “날이 밝았을 때 센터 차원에서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내담자가) 실수라고 생각해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카톡을 보낸 건 실수였다고 치자. 정말 추파를 던질 속셈이었다면 대화방을 나가기보단 채씨 반응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윤씨는 자기 폰에 채씨 번호를 갖고 있었을까. 그는 상담사도 아니었다.

본래 재무 담당이지만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이나 센터로 걸려오는 전화도 응대하고 있었다. 윤씨는 자기 폰을 개인용·업무용 구분 없이 쓰면서 내담자 번호를 저장했다고 한다. 주먹구구식 개인정보 관리가 부른 참사였다.

상담윤리는 법보다 못한가

센터는 한참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않았다. 김씨는 “채민주님께 연락을 드렸지만 답변이 없어 그 상황을 양해해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채씨는 성폭력 사건 법적 절차에다 건강문제까지 겹쳐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해 12월 민우회를 찾아가 상담기관 변경을 요청했다. 사건은 이때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센터는 지난해 3월 민우회 공문을 받고서야 공식 사과문과 재발방지 조치 서약문을 내놨다.

다른 성폭력상담기관에 해당 사건을 공유하라는 요구엔 머뭇거렸다. 상담윤리상 내담자 사례를 함부로 노출할 수 없다는 논리였지만 채씨 신상을 익명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사례가 외부에 알려졌을 때 센터가 받게 될 타격을 더 걱정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지난해 4월 말 민우회는 센터와 협력 관계를 중단했다.

“법률적으로는 아무 잘못이 없거든요.” 지난 17일 취재진과 통화한 17분 동안 윤씨는 ‘법률적으로’라는 표현만 7번 사용했다. “법률적인 문제로 가면 사실 저는 아무 잘못이 없거든요.” “법률적으로는 이게 쟁점이 될 수 없고요.” “법률적으로는 제가 잘못한 거 없어요. 진짜요.” 윤리적으로 잘못한 건 맞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런 얘기를 반복했다. 그와 달리 센터장 김씨는 사건 직후 채씨에게 직접 사과할 기회를 놓친 사실을 거듭 자책했다.

‘네 탓 상담’에 죽음까지 생각했다

“성희롱, 성추행은 희연씨의 제스처나 분위기가 성적 매력이 있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면이 있어서 생기는 거예요.” 성범죄 피해로 트라우마를 겪는 최희연(가명·여)씨에게 그 남자는 이런 말을 상담이라며 했다고 한다.

최씨는 상담사 정석준(가명)씨에게 상담받는 동안 “여성호르몬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건 선천적인 것 같아요” “상담사가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가 돼야 하니 당분간 남자친구를 사귀지 마세요” 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최씨는 “정말 내 잘못인가, 나는 성범죄를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상담사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서 차라리 몸을 팔아야겠다거나 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트라우마와 공황장애, 우울증, 불안, 불면 등을 겪던 중 심리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정씨는 상담 도중 최씨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말 안 할 거면 뭐 하러 왔느냐”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최씨는 이 상황이 성폭력을 당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고 한다.

상담사인지 술친구인지

함께 술을 마시며 상담한 적도 있었다. 최씨가 “상담이 힘들어 술 마시면서 얘기하고 싶다”고 하자 정씨는 “같이 먹어줄 테니 다음 상담 땐 원하는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혼자 마시며 상담을 받기도 했고, 술이 남으면 보관도 해줬다.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던 그는 6개월간 끊었던 술을 상담 이후 다시 찾게 됐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30일 정씨에게 전화로 사실관계와 입장을 물었다. 깊은 한숨만 들려왔다. 정적 끝에 “오늘은 밤까지 일해야 돼서 (통화가) 안 된다”고 말했다. 다음 날 세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 정씨는 심리학 석사 과정 수료자다. 홈페이지 등에 따로 밝혀 놓은 자격은 없다.

정씨는 한 유명 심리상담센터의 집단상담에도 주요 상담사로 참여하고 있다. 해당 센터 대표는 “정씨는 제 직원이 아니다. 두 분 사이 상담 내용은 제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도 상담윤리보다 법이 먼저라는 듯 “법적 기관 등을 통해 분명히 가리기 전에는 (정씨의 상담에) 문제가 있다, 없다를 말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전문가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서울시내 한 심리상담센터 대표는 “도박 중독자한테 ‘도박하러 가자’거나 성 중독자한테 ‘야한 거 같이 보자’고 하진 않지 않으냐”며 “알코올을 성이나 도박으로 바꿔보면 말도 안 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담자와는 상담이 끝나고도 2~3년간은 술을 같이 안 마신다”고 덧붙였다.

전자발찌 차고 상담


상담 분야 양대 학회인 한국상담학회나 한국상담심리학회는 윤리강령에서 상담사가 어떤 식으로도 내담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성적 접촉을 엄격히 금지한다. 내담자 가족과도 안 된다고 할 정도다. 상담이 끝났더라도 최소 2~3년은 내담자와 성적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 상담실 밖에서 사적으로 교류하는 것도 금기사항이다. SNS 친구도 맺지 말라고 한다. 또 내담자가 상담사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도 규정했다.

하지만 지키고 말고는 상담사 개인에게 달렸다. 윤리강령을 어기더라도 상담소 문까지 닫게 할 권한이 학회에는 없다. 학회 소속 상담사라면 사안별로 자격 영구박탈까지 가능하지만 상담소 운영은 자격증이 없어도 가능하다. 학회 소속 상담사가 아니라면 문제조차 삼을 수 없다. 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면 정부가 대신 나서주지도 않는다.

상담사가 내담자나 제자인 수련생을 상대로 저지르는 성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내담자는 심리적으로 취약한 이들이 많고, 수련생은 자신을 지도하는 상담사를 거스르기 어렵다. 상담사가 권위자일수록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우가 많고 이런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도 쉽지 않다고 현장 상담사들은 말한다.

‘사이코드라마치료’로 유명했던 심리상담가 김모씨는 2017년 2월부터 3개월간 내담자를 8차례 추행하거나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받았다. 재난심리상담 분야 국내 권위자로 꼽히던 한 대학교수는 박사과정을 밟던 제자를 2014년 12월부터 2016년 5월까지 14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부는 ‘그루밍’(길들이기) 성범죄로 판단했다.

성범죄를 저질러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심리상담소 운영을 막을 길이 없다. 자격 요건이 따로 없어 사업자등록만 하면 누구나 심리상담소를 차릴 수 있다. 정말 아무나 차릴 수 있다. 지난해 5월엔 강제추행과 강간 전력이 있는 50대 심리상담사가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를 찬 채로 심리치료센터에서 또다시 성범죄를 저질렀다.

김희수 한국상담학회장은 “전문가가 아닌데 상담을 하거나 전문가 중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며 “이들을 막으려면 법제화를 통해 그 테두리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 화에선 심리상담계가 왜 이렇게 도떼기시장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원인을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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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탐사팀 강창욱 이동환 정진영 박장군 기자 issue@kmib.co.kr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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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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