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더불어(語) 사전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더불어(語) 사전

입력 2022-06-10 04:20

수박·똥파리·개딸·양아들…
민주당 지지층에서 통용되는
그들만의 언어는 배타적이다

배척의 언어에 담긴 인식을
정치적 자산이라 여기면서
민주당 정치는 편 가르기가 됐다

이런 이들에게 계속 휘둘리면
정치는 더욱 극단화할 것이다
‘더불어’란 당명이 무색하게

“수박을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똥파리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다.” 며칠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이 문장을 해석하려면 ‘수박’과 ‘똥파리’의 뜻을 알아야 한다. 이 커뮤니티엔 주로 이재명 의원 지지자들이 모여 있다. 수박은 민주당에 있지만 속내는 보수인 배신자란 말인데, 최근 이원욱 의원이 그렇게 불렸다. 지방선거 패배 후 이재명 의원을 비판한 그에게 수박이라 공격하는 문자폭탄이 날아들었다. 똥파리는 이재명을 거부하는 문재인 지지자를 뜻한다. 최민희 전 의원은 대선 당시 “극문 똥파리 빼고는 (친문세력도) 다 뭉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극문 똥파리’는 반명(반이재명) 극렬 문파란 뜻이었다. 그러니까 저 커뮤니티 문장은 “당내 보수 배신자를 벌해야 장차 반명 문파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뮨파’란 말도 있다. 문재인의 ‘문’과 윤석열의 ‘윤’을 합친 뮨파는 윤석열 지지로 돌아선 문파를 일컫는다. 대선 때 윤석열 지지선언을 했던 정운현씨 등 이낙연 캠프 일부 인사나 깨어있는시민연대 같은 그룹이 해당한다. 많이 알려진 ‘개딸’(개혁의 딸)은 이재명을 지지하는 2030 여성인데, 이들에게 동조하는 4050은 ‘개삼촌’ ‘개이모’로 불린다. 환갑이 다 된 조정식 의원은 스스로 ‘개중진’(개혁의 중진의원)이라 칭하며 발을 걸쳤다. ‘양아들’(양심의 아들)과 ‘희아’(희망의 아줌마)는 개딸과 생각이 같은 남성, 아줌마를 부르는 말이다.

더불어민주당 강성 지지층 커뮤니티에선 이런 용어를 숙지해야 글을 읽을 수 있다. 뜻풀이 사전이 필요한 그들의 언어는 계속 확장하는 중인데, 실제 어떤 이가 어휘해설집을 올려놓았다. ‘밭을 갈다’(이재명을 지지토록 주위를 설득하다) ‘발치하다’(이를 뽑다. 즉 이재명을 뽑다) ‘아묻따’(아무것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지지하다) ‘마삼중’(마이너스 삼선 중진. 국회의원 세 번 낙선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뜻함) ‘주학무’(주부·학생·무직. 이들이 대선서 2번을 많이 찍었다며 통칭하는 말) ‘부자연습생’(경제적 약자인데 2번에 투표한 사람)…. 서술어는 ‘~잖아체’(“내가 책을 샀어” 대신 “내가 책을 샀잖아” 하는 어느 개딸 커뮤니티 화법)가 보편화됐다.

“어제 밭을 가는데 그 사람이 자꾸 마삼중 얘기를 꺼내잖아. 부자연습생이었어. 아묻따가 안 돼.” 이렇게 그 무리의 일원이 아니면 독해 불능인 그들만의 언어가 생겨났다. 수박, 똥파리, 뮨파, 개딸, 양아들, 희아, 주학무, 부자연습생…. 이런 말은 어떤 집단을 지칭하는 이름이란 공통점을 가졌다. 이들은 작명에 무척 골몰한다. 이름을 짓는 것은 구별하는 일이고, 구별은 선을 긋는 행위다. 그 집단은 내 집단과 다르다, 이 집단은 우리와 비슷하다, 하면서 끊임없이 울타리를 쌓고 있다. 그들이 붙이는 이름에는 선명한 가치판단이 담긴다. 내 편에는 개혁 양심 희망, 내 편이 아니면 배신 변절 또는 세상 물정 모른다는 조롱. 그렇게 쌓아 올린 울타리 안에서 통용되는 그들만의 언어. 한국 정치판에 수많은 조어, 은어가 출몰했지만, 이렇게 배타적인 언어가 또 있었나 싶다.

정치 팬덤의 시작인 노사모는 노무현이 지향한 가치에 공감하는 이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문재인의 문파, 이재명의 개딸로 이어지면서 공감의 대상은 가치가 아닌 사람이 됐다. 문파와 개딸이 추구하는 가치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떠올리기 어렵다. 각각 추앙하는 사람이 다를 뿐이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이렇게 변질된 팬덤을 자산으로 여겼다. 문 전 대통령은 “양념”이라 했고, 이 의원은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정치 행태”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들이 만들어낸 배타적 언어를 정치 무대에 가져다 썼다. 민주당 의원들의 SNS에선 수박 같은 어휘부터 잖아체까지 거부감 없이 사용한 글이 자주 보인다. 최민희 전 의원처럼 정치적 대화에서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사람도 있고, 조정식 의원처럼 그들의 눈에 들려고 의식적으로 쓰기도 한다. 이 언어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제 ‘더불어(語)’ 정도는 돼야 걸맞지 않을까. 말은 생각을 규정한다. 배척의 언어와 함께 민주당 정치는 갈수록 노골적인 편 가르기가 돼 왔다.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분석한 에즈라 클라인의 책을 국내에 펴내면서 출판사는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거대 정당이 배타적 언어에 끌려다닌다면 한국 정치는 더욱 극단화하고, 그 판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욱 미워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란 당명과는 정반대로.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