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고금리에 숟가락 얹는 은행들

국민일보

[이동훈 칼럼] 고금리에 숟가락 얹는 은행들

입력 2022-06-15 04:20

고물가 정점 예상 빗나가
금리 인상 속도전 불가피

정부의 혈세 정책만으론
고금리 사태 타개 역부족

가계대출로 최대 실적 챙긴
5대 은행 고통 분담 나서길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 도입부다. 시민·시범 아파트 건축 등 내 집 마련 정책 시행이 한창이던 1972년 발표됐는데 이 노래를 모르면 간첩으로 의심받을 정도였다. 지난해 국민의힘 서울시장 보궐선거 경선에 나선 나경원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남진의 캠프 방문 소식과 함께 이 노래를 소환한 뒤 “부동산 대책처럼 들린다”고 농담했다. 그는 서울 거주 청년과 신혼부부들에게 연 3%의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3년간 지원하는 등의 파격적인 부동산 대책으로 농담이 아님을 강변했다. 서민들 내 집 마련의 꿈이 얼마나 요원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경선에서는 졌어도 그의 공약이 윤석열정부에 영향을 준 듯하다. 한 백 년까지는 아니지만, 청년과 신혼부부들이 반 백 년 내 집 생활을 할 수 있는 대출 상품을 준비하고 있어서다. 지난달 코로나 민생대책에 포함된 50년 만기 고정금리 대출상품으로 주택금융공사가 설계 중이라고 한다. 정부는 1·2금융권 변동금리 대출을 저금리 대출로 갈아타게 하고, 자산관리공사가 3년간 부실 채권 30조원어치를 매입하는 방안도 민생대책에 포함했다.

그러나 5~7월 정점이 예상됐던 고물가 사태가 이들 대책으로는 난관을 뚫기엔 역부족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은 16일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이상 금리 인상)을 밟을 가능성이 커졌다. 현재 1.75%인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올 연말 2.5%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되지만 미국 등의 금리 인상 속도전에 대응하려면 우리도 큰 폭의 금리 인상이 불가피해 보인다. 2030 ‘영끌족’과 자영업자들은 가계 빚 위기폭발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정부의 가계부채 대책 마련 과정을 보면 당국만 고군분투하는 형국이다. 부동산 경기 활황기 가계대출 증가에다 예대금리차를 늘려 사상 최대 실적을 본 5대 은행은 숟가락만 얹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40년짜리 주택담보대출 상품을 잇달아 내놨지만, 정부 정책에 마지못해 시늉만 하는 눈치다. 은행들은 만기를 연장하면 빌릴 수 있는 금액이 커지고 매달 갚는 원리금은 줄어든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상품엔 지금 같은 금리 급상승기에 고객이 절실한 혜택은 보이지 않는다. 혼합형이라고 해서 처음 몇 년은 고정금리로 취급했다가 변동금리로 바뀌는 기존 상품에 만기만 늘려 놨다. 순수 고정금리 대출은 오로지 주택금융공사 몫이다. 정부가 마련한 안심전환대출만 해도 벌써 3번째 대책으로 언제까지 혈세로만 충당할지 한심하다. 공사가 발행하는 주택저당유동화증권(MBS)을 넘겨받는 은행들은 이중으로 수익을 볼 게 뻔하다. 정부는 가계부채에 경고등이 켜질 때마다 고정금리 활성화 대책을 내놨으나 말만 요란할 뿐 조달금리 탓만 하는 은행들은 비켜나 있었다.

은행들이 기대는 언덕은 따로 있다. 고객이 고정금리를 택해도 은행이 국가 경제나 금융 사정의 급격한 변동을 이유로 금리를 바꿀 수 있는 여신거래 기본약관 규정이 그것이다. 은행의 장기 고정금리 상품이 의미가 없는 이유다. 대법원도 시장에 사정이 생기면 금융기관 보호가 우선이라는 취지로 판결한 적이 있다. 2016년 국민은행이 연 10%로 고정된 주택청약예금 금리를 기준금리가 1.25%까지 떨어져 상품 금리 유지가 어렵다며 1.8% 변동금리로 바꾼 것도 같은 논리다. 이 예금은 1기 신도시 건설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국책은행인 옛 주택은행이 1988년부터 91년까지 판매한 상품이다. 약속을 어겼다는 민원이 쇄도하자 금융당국은 약관에 어긋나지 않으며 오히려 “은행의 가격 결정에 자율성을 주겠다”고까지 선언했다. 아무리 윤석열 대통령이 예대금리차 공시를 공약한들 금리 결정권은 은행들이 무소불위 권한으로 부여받은 셈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은행들이 배짱을 부릴 만큼 한가해 보이지 않는다. 1900조원의 가계 부채 대책을 위해 총력을 기울일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가계 연쇄 파산으로 은행이 부실해지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을 수 있다. 외환위기 때 문 닫을 지경에 몰렸다가 공적자금으로 회생한 곳은 연간 34조원의 이자 재미를 보고 있는 지금의 은행들이다. 이제는 가계부채 연착륙을 위해 은행이 고통 분담에 나서야 할 때다.dhlee@kmib.co.kr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