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티 테이블] 우린, 그렇게 어른이 된다

국민일보

[이지현의 티 테이블] 우린, 그렇게 어른이 된다

입력 2022-06-18 04:03

보통 어른이 되면 마음도 그만큼 단단해질 줄 안다. 어지간한 일에 쉽사리 넘어지지 않고 울지도 않을 줄 안다. 그러나 괜찮지 않다. 어른이 돼도 삶은 아직도 서툴고 감정은 여리고 쉽게 상처받는다. 배우 윤여정의 “나도 67살은 처음 살아봐요”라는 말에 대중이 뜨겁게 공감했던 이유도 나이를 들면서 계획대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어른’이라고 처음 느꼈던 순간을 기억해보자. 주민등록증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투표권을 처음 행사했을 때,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됐을 때 등, 어른이 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 어른임을 느낀다. 혁수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큰 수익이 보장된 계약을 스스로 날려버린 창희는 친구들이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묻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뭐든 입으로 털잖냐, 근데 이건 안 털고 싶다.… 말들이 막 쏟아지고 싶어서 혀끝까지 밀려왔는데 밀어 넣게 되는 그 순간, 그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거다.” 어떤 일을 해낸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질 때가 어른이 되는 순간이 아닐까.

세상엔 무수한 종류의 어른이 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현실의 짐들을 등에 지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주어진 현실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지혜와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피할 수 없는 감정이 불안이다. 전 세계적으로 청년 고용시장이 무너지면서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청년들이 많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현재의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은 감정적인 것뿐 아니라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히며 열이 확 올라오는 등의 신체적 불안 증세처럼 몸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불안을 느끼는 것이 꼭 나쁜 건 아니다. 그 원인을 알아보면 지금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시험이나 면접 같은 불안 요인이 뚜렷한 예도 있지만 별 이유 없이 막연히 불안할 때도 있다. 불안은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대부분 예기불안이다. 이러다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무의식에서 오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그러기에 불안을 느끼는 한편 불안에 적응하고 대비할 수 있다. 시험을 앞둔 사람이 불안하지 않으면 공부를 하겠는가? 불안은 어느 정도 마음을 준비시켜 큰일을 막게 한다. 불안은 우리에게 행동할 힘을 준다. 불안하기에 일하고 마음을 전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독일 시인 헤르만 헤세는 불안하다면 불안의 정체가 보일 때까지 그 불안을 지그시 바라보라고 말한다. 익숙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떨쳐 일어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무섭고 떨리는 일이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헤세는 산다는 건 그 공포와 불안을 뛰어넘어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라며 그저 한 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라고 제안한다. 그는 자전적 소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에서 이렇게 말했다. “쓸데없는 망설임을 끊고 싶다면 딱 한 시간만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심혈을 기울여 온 힘을 다해 일에 몰두하라.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 고민했던 망설임의 깊은 연못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우리가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것들, 곁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떠나보낼 때가 됐음을 아는 것이다. 어른이 되려면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 외 남에게 관심을 두고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느낄 수 있는 능력, 다음 세대를 위해 미래에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원하는 바를 다 이루고 마음이 편해지는 삶은 언제일까. 아쉽게도 우리 삶에 그런 시절은 오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순간순간 성장하기 위한 새로운 과제를 받는다. 우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재배열되며 교정된다. 아무리 좋은 것을 달성하더라도 좀 있으면 권태로워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는 불안을 느끼며 성장할 것이고 이는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어른의 삶은 바란다고 무조건 바뀌지 않는다. 꼭 앞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 뒤로 옆으로 좀 가도 된다. 다만 가만있지만 말자.


이지현 종교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