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걷자생존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걷자생존

온수진 양천구 공원녹지과장

입력 2022-06-22 04:08

영화인 하정우씨의 책 ‘걷는 사람, 하정우’에는 하루 목표 3만보를 채우기 위해 단둘이 하는 업무미팅은 근처 도산공원을 걸으며 진행하는 대목이 나온다. 크게 깨달았다. 바닥이 잘 닦인 너른 길은 둘이 대화하며 걷기에 좋다. 연인이 함께 걷는 덕수궁 돌담길처럼. 바닥이 균질하지 않으면 대화가 어려운데, 서로 발밑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등산로가 대표적이다. 등산은 여럿이 가도 각자 걷는다. 잡념은 사고를 부르니 한 발 한 발 집중하며 생각을 떨쳐야 한다(다만 등산은 일정 시간 강제로 머리를 비우므로 마치면 몸은 노곤하나 머릿속이 맑아진다). 걷는 길은 바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차량과 섞이지 않아야 한다. 무례한 차량과 아무 때고 맞닥뜨려야 하거나 반복해 신호등을 기다리는 길은 몸보다 우선 정신에 위협적이다. 이렇듯 잘 닦여지고 연결되고 안전하고 독립된 길이, 도시의 살길이다.

완만하고 좋은 길은 둘이 걸어도 좋지만 혼자 걸을 때 더 빛난다. 무엇보다 발 디딤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할 수 있다.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맘대로 속도를 높이거나 줄이며 몸을 들여다보거나, 몸은 그저 길에 올려두고 생각에 집중해 머릿속에 문제를 살살 굴리는데, 꼭 풀린다. 등산처럼 머리를 비우고 싶다면 그냥 끌리는 음악을 들어도 좋다. 누구든 이런 길을 주변에서 꼭 찾아 걷길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집 근처 경복궁 돌담길(2.5㎞)과 회사 근처 신정산 둘레길(2.7㎞)을 걸으며 제반 문제를 푸는데, 이 길이 나에겐 ‘철학자의 길’ 이상이다.

팬데믹으로 재조명받았지만 세계 도시들은 그린웨이(Green-way)라 통칭하는 걷기 좋은 길을 만드는 데 전력투구해 왔다. 프랑스 파리를 비롯한 여러 곳의 ‘15분 도시’ 전략도 결국 걷기, 자전거, 대중교통 활성화를 통해 걷고 싶은 도심 생활권을 지향한다. 글로컬한 무한경쟁 속에서도 걷기는 몸과 마음을 지키고, 좋은 길은 도시를 지키며 함께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온수진 양천구 공원녹지과장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