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기자의 안녕, 나사로] ‘즐겨냄’ 발견한 그대가 행복해

국민일보

[최기영 기자의 안녕, 나사로] ‘즐겨냄’ 발견한 그대가 행복해

은혜씨… 그리고 그림 그리기

입력 2022-06-25 03:05 수정 2022-07-27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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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혜(왼쪽) 작가가 2019년 4월에 그린 자신의 초상화. 4000명 넘게 캐리커처를 그려온 그는 “사람들이 ‘그려 주세요’할 때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영화사 진진 제공

그를 처음 만난 건 5년 전 가족과의 나들이 길에 들른 경기도 양평 문호리의 리버마켓이었다. 접이식 캐노피 천막 아래,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캐리커처 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그를 보며 아이들에게 “멋진 그림을 그려주시나 보다”라고 소개하자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니 얼굴.”

쉬이 잊히지 않던 미소와 독특한 억양을 마음에 간직해오다 얼마 전 그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김혜자 고두심 이병헌 차승원 한지민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과 함께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tvN)가 종영하고도 대중으로부터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이름. 정은혜 작가(배우)다.

최근 미션라이프 유튜브 콘텐츠 촬영 현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반갑습니다”라는 짤막한 인사에 은혜씨는 5년여 시간을 타임머신 타고 돌아간 듯 무심한 미소를 지으며 “네. 목소리가 차..착하시네요”라며 의식의 흐름대로 맞받았다.

드라마는 아름다운 풍경을 품은 제주 푸릉마을과 오일장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옴니버스 형태로 펼쳐 보인다. 다양한 인물관계도 속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배우들이 뿜어내는 제주도 사투리 대사만큼이나 각별하다. 그중에서도 대중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이야기가 바로 다운증후군을 앓는 쌍둥이 언니 영희(정은혜)와 동생 영옥(한지민)의 삶이다.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과 그 가족이 겪는 일상 속 차별과 상처를 대사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 담아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생생하게 보여 줬기 때문이다.

작품 속 영희의 이야기엔 은혜씨의 삶이 오롯이 투영된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영옥이 영희에 대해 “그림 같은 거 못 그려. 기대하지마”라고 잘라 말했다가 영희의 그림을 뒤늦게 확인하곤 오열하는 장면이다. 은혜씨가 스물셋이 됐던 지난 2013년에야 처음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 장차현실씨의 모습이 딱 그랬다.

딸을 향해 줄곧 “은혜씨”라 부르며 촬영을 위한 메이크업을 돕던 현실씨는 “장애 있는 딸을 나름 편견 없이 키워왔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결국 나도 하나 다를 것 없이 아이를 장애라는 한계에 가뒀구나 싶어 충격이 컸다”고 했다.

은혜씨는 지금까지 4000명 넘게 캐리커처를 그려오는 동안 “사람들이 ‘그려 주세요’할 때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그렇게 은혜씨가 추구하는 행복은 그만의 독특한 화풍이 되어 판에 박혀 있던 ‘장애’라는 틀을 깰 수 있었다.

아홉 살 아들과 처음 ‘한강 라이딩’에 나섰던 날이 떠올랐다. 동네 놀이터, 작은 공원에서 조심스레 페달 밟던 아이에게 한강의 자전거도로는 그야말로 ‘야생’이었을 터였다. 기대를 걸었던 건 딱 하나였다. 그동안 아빠 손에 들려 있던 걸 아이 손에 들리게 하는 것. 헬멧을 고쳐 쓰고 주의사항을 알려준 뒤 라이딩 시작.

우려와 달리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이는 태블릿 화면에 지도를 띄워놓고 현재 위치가 어딘지, 어디쯤 가서 잠시 멈출지부터 표시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표시해 둔 지점에선 삼각대에 스마트폰을 끼워 자기 시선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아빠 손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풍경 한 컷이 담길 때마다 반짝이는 아이의 눈빛에 절로 미소가 새어 나오던 초보 아빠의 모습도 그중 하나로 남겨졌다.

성경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라고 말한다. 크리스천 부모로서 또 한 번 다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의 ‘즐겨냄’을 부모의 편협한 경험 안에 가둔 채 재단하지 않을 것, 나아가서는 자신의 도전을 즐겨내는 아이의 모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게 미성숙한 아이에게도, 여전히 성숙을 함께 고민하는 부모에게도 행복을 심어줄 수 있는 길이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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