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미국의 퇴행

국민일보

[돋을새김] 미국의 퇴행

이영미 영상센터장

입력 2022-07-05 04:08

엘살바도르 싱글맘 엘시는 2011년 가사도우미로 일하다 유산을 경험했다. 병원에 간 엘시는 치료를 받는 대신 살인죄로 체포됐다. 그녀는 지난 20년 동안 엘살바도르에서 태아 살인죄로 기소된 181명 임산부 중 한 명. 엘살바도르에서는 강간, 근친상간 이유를 불문하고 모든 임신중지(낙태)가 불법으로 간주된다. 건강한 아기를 생산하지 않는 모든 임신이 잠재적으로 조사와 처벌 대상이 된다는 뜻. 그렇게 성폭행범 아기를 사산한 10대 소녀가, 갱단 멤버에게 성폭행당한 뒤 가진 줄도 몰랐던 죽은 아기를 낳은 여대생이, 그리고 혼외 아이를 유산한 30대 여성이 살인죄로 감옥에 갔다. 피해자가 벌 받는 오싹한 반전. 엘살바도르에서만 생기는 일일까.

미국 미시시피의 래티스 피셔는 2017년 36주가 된 넷째 아이를 사산했다. 구급대가 왔을 때 아기는 심장박동이 없었다. 부검을 했지만 특이점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경찰은 가난한 흑인 엄마를 의심했다. 휴대전화를 뒤져 임신중지약을 검색한 기록을 찾아냈고, 엄마를 다그쳐 부양 능력이 없어 넷째를 원치 않았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약을 먹은 증거는 없었다. 상관없다. 어쨌든 래티스는 기소됐다. 20년형에서 종신형까지 가능한 2급 살인죄였다.

미국 대법원이 지난 반세기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보장해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은 뒤 미국 여성계가 충격으로 들끓고 있다. 결정타는 대법원의 보수화였다. 하지만 그건 결과일 뿐 퇴행 조짐은 몇 년 전부터 미 전역에서 감지됐다. 대표 주자가 텍사스다. 텍사스는 지난해 6주 후 임신중지를 금지한 심장박동법을 도입했는데 법의 구조가 기발했다. 당시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유효하던 시절. 그래서 텍사스는 형사처벌 대신 민사소송이란 카드를 꺼냈다. 개인이 임신중지 시술을 하는 의사와 클리닉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게 만든 거다. 이기면 포상금도 준다. 만약 직장 동료의 임신중지를 들었다고 해보자. 동료와 클리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 1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 만인이 임신부를 감시할 동기가 생긴 거다. 대법원을 우회한 텍사스의 성공은 보수 성향 주들을 고무시켰다. 유사 입법이 줄을 이었다.

소송 효과는 분명하다. 래티스 같은 엄마를 감옥에 보내면 여론이 발끈한다. 의사를 소송 위험에 노출시키면 그들은 조용히 태도를 바꾼다. 벌써 일부 의사는 유산 위험이 있는 임신부 진료를 거부하고 있다. 낙태로 오인받아 소송에 휘말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돌려쳐도 다치는 건 여성들이다. 폴란드에 비극적 사례가 있다. 미용사로 일하는 30세 이자벨라는 지난해 9월 양수가 터져 병원에 갔다가 그대로 세상을 떴다. 의사는 22주 태아가 선천적 결함으로 곧 사산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 밤 의사는 수술을 하는 대신 기다렸다. 태아 심장이 뛴다는 이유였다. 다음 날 아침 태아가 죽었을 때는 엄마 역시 사망한 뒤였다. “(낙태금지법을 통과시킨) 집권당 덕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는 중.” 그녀가 죽기 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문자였다.

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임신중지를 효과적으로 줄였다고 해보자. 그게 끝일까. 모든 임신부가 태아를 안전하게 키우는 건 어떻게 확인하나. 걱정은 미국에서 놀라운 입법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위스콘신에서는 법원이 태아 보호를 위해 태아 구금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태아를 어떻게 구금할까. 엄마를 구금하면 된다. 실제 연간 400명의 임신부가 태아 안전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구금된다. 디스토피아 소설 같지만 현실이다.

퇴행에는 반발이 따른다. 미국 여성들이 이런 퇴행을 그냥 받아들일 리도 없다. 그래도 당분간은 힘든 시간이 될 거 같다. 쏟아지는 미국발 뉴스가 장맛비만큼이나 꿉꿉한 여름이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