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동 칼럼]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국민일보

[박현동 칼럼]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입력 2022-07-12 04:20 수정 2022-07-12 04:20

차디찬 9월의 서해 바다에서/북한에 무참히 피살된 공무원/국가는 그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진보정권이든 보수정권이든/국민의 생명보호가 존재 이유/국민 목숨 담보로 얻을 건 없어

지금은 진실 규명의 시간일 뿐/여야가 정쟁으로 몰아간다면/국민의 냉정한 심판 각오해야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함으로써 국가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강제하고 있는 4대 의무도 이런 믿음 위에서 이뤄진다. 이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변할 수 없다.

진보정권이든 보수정권이든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미 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종종 무시되거나 의심받는다.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 피살사건이 그렇다. 당시 정부가 취했던 대응조치들은 국가의 존재 이유를 심각하게 되묻게 한다. 말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본질을 덮진 못한다. 나아가 국가의 존재 이유를 유보시킬 순 더더욱 없다. ‘사람이 먼저’인 정권이 아니었던가.

정치권은 ‘월북이냐, 아니냐’를 놓고 거친 다툼을 벌이고 있으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국민들은 왜 그의 생명을 온전히 구하지 못했는가를 추궁하는 게 아니다. 국가는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했으며, 최선을 다했는지, 그럴 의지가 있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실종에서 피살, 소각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대응조치를 보면 의문투성이다. 설사 그가 월북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피살됐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의 책무를 결코 면책하지 않는다. 차디찬 9월의 서해 바다에서 북한군 총구가 자신을 향했을 때 느꼈을 공포를 상상이나 해봤는가.

한데 돌아가는 꼴이 요상하다. 일각에서 현재 권력이 과거 권력을 공격하기 위해 꺼낸 사안이라며 정치공학적으로 해석한다. 매우 위험한 인식이다. 심지어 “피살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다. 먹고사는 문제가 얼마나 급한데 이게 왜 현안이냐” “민생이 이렇게 힘든데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가지고…”라는 발언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망언이다. 생명과 먹고사는 문제는 각각 보호받고 존중돼야 할 사안이지 선후의 문제가 될 순 없다.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이유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정권에 따라 국민 생명의 존엄성이 달라져선 안 된다는 건 토를 달 수 없는 명제다. 뻔한 말이지만 생명은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피살된 이씨는 오천만 국민의 한 명이다. 하지만 국가가 한 명의 생명을 하찮게 여긴다면 국민 모두의 생명 또한 하찮은 존재가 된다. 뒤집어 말하면 한 명의 소중한 목숨은 모두의 소중한 목숨과 같다. 물론 툭하면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말로 협박하고, 심지어 고사총으로 고모부를 쏴 죽인 그들이기에 섣불리 대응하기 힘든 건 안다. 거칠게 다뤘다간 깨지기 쉽고, 원칙을 저버리면 끌려가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평화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그런 평화가 진짜 평화일까.

미국이 오토 웜비어 사건을 어떻게 대응했는지 보면 우리와 너무나 비교된다. 웜비어는 2015년 북한을 방문했다가 억류 17개월 만에 귀국하지만 식물인간 상태였다. 그러곤 엿새 후에 죽었다. 미국 언론은 물론 정치권, 지식인 등 모두가 분노했고, 사법 당국은 북한에 5억113만 달러 배상 판결을 내렸다. 국민 생명 앞엔 여야도, 진보도 보수도 없었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헌신은 가히 무한대였다. 미국이 강대국인 이유는 단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강해서가 아니다. 이렇듯 국가의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해 공무원 피살은 해석의 여지가 큰 사건이 아니다. 실종에서 피살까지의 팩트를 재구성하면 진실에 접근 가능하다. 극도로 폐쇄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북한이지만 우리의 정보 능력을 감안할 때 의지만 있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만에 하나 윤석열정부의 정치적 액션이라면 공정과 상식에 반할 뿐 아니라 자해행위다. 분명 가혹한 후과가 뒤따를 것이다. 반대로 인권과 평화를 강조해온 문재인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저버리고, 이마저 숨기기 위해 ‘월북’을 가장하려 한 사실이 드러난다면 이 역시 국민의 심판을 면하기 어렵다.

당부컨대 여야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희석시키지 말라. 국민 목숨은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국민의 생명보다 존귀한 것이 있는가. 오로지 진실 규명만을 위한 조치를 취하라. 해석은 진상이 파악된 후에 해도 된다. 지금은 진실 규명의 시간이다.

박현동 편집인 hd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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