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대통령의 머리는 민간에서 빌려도 된다

국민일보

[이동훈 칼럼] 대통령의 머리는 민간에서 빌려도 된다

입력 2022-07-13 04:20

장기적 국가미래 전략 위한
싱크탱크 역할이 중요해져

새 정부는 국정 코드 빌미로
국책 연구기관장 사퇴 압박

이참에 공공개혁 차원에서
연구원 독립성 회복시켜야

“머리는 빌리면 된다.” 이념과 정파를 초월한 인사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말로 유명하다. 뭐니 뭐니 해도 ‘두뇌 차용론’의 원조는 삼국통일의 꿈을 안고 삼고초려까지 해가며 당대 최고의 책사 제갈량을 영입한 유비가 아닐 듯싶다. 오늘날엔 책사 한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모인 싱크탱크(두뇌집단)가 국가의 미래 설계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흥미로운 일은 근현대로 갈수록 두뇌집단은 군사전략에 기반을 둔 ‘제국주의 경영’의 배후에 있었다는 점이다. 웰링턴 장군이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무찌른 뒤 설립한 왕립국방안보연구소(RUSI)는 대영제국의 대표적 싱크탱크다. 미국 공군의 제안으로 1946년 창립된 이래 2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랜드연구소는 미국 제국 탄생에 기여했다. 국방 분야에서 출발했지만 게임이론, 합리적 선택이론 등 신자유주의 매트릭스를 선보이며 현대 경제이론을 주도했다.

싱크탱크가 1970~80년대 전 세계에 유행처럼 늘어난 것을 보면 냉전 시대 군사문화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국방 분야보다 경제 싱크탱크를 먼저 만들었다. 1967년 농촌경제연구원을 설립해 녹색혁명을 일궜다. 1971년엔 경제기획원에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두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토록 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설립비용 대부분(13억 달러)을 미국에서 지원받고 국제 개발처 고문과 미국 유학생을 대거 영입해 미국의 시스템을 이식했다.

정작 KDI 연구원들은 자신들을 조선 세종대왕의 국책 연구를 도운 집현전 학자로 부를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그 이유로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든 집현전 학자들의 반골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김대중정부 시절 관료들이 연구보고서를 ‘마사지’한다며 언론 제보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나, KDI에 근무했던 유경준 의원이 통계청장 시절 박근혜정부에 유리한 통계 ‘마사지’ 요구를 거부하고 과감히 옷을 벗은 건 특유의 투사적 전통을 반영한다. 김영삼·김대중정부가 군사정권들과 달리 정부 소속 기관들을 정부 출연 형태로 분리해 ‘작은 정부’를 구현하려 했던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인 이명박정부가 반대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공공기관 개혁을 명분으로 연구 독립성을 훼손하면서 국책 싱크탱크 정체성은 심하게 흔들렸다. 30년 이상 장기 미래 국가전략 보고서는 휴지조각이 됐다. 기획재정부는 정부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한국은행 금통위원에 KDI 등 국책 연구기관 출신들을 추천하는 일이 잦아지고, 이들 기관은 정권 교체 때마다 권력을 좇는 해바라기 조직으로 전락해갔다.

새 정부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윤석열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여온 ‘상식’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진다. 4년 전 부동산 보유세 인상을 주창했던 조세재정연구원이 최근 정반대의 보고서를 내놓은 것은 부동산시장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정권교체를 반영한 것일까. 한덕수 총리는 실패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주역이라며 홍장표 KDI 원장 사퇴를 압박하더니 결국 뜻을 관철했다. 얼마 전 한 총리가 홍 원장 후임 경제수석으로 소주성 정책을 폈던 윤종원 기업은행장을 국무조정실장으로 내정할 때는 별문제 없다고 한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KDI 원장은 윤석열정부의 ‘두뇌’로서 결격이고, 국무조정실장은 총리 말만 들으면 되는 영혼 없는 ‘수족’으로서 괜찮다는 걸까.

전 정부 임명 기관장 등의 사퇴를 놓고 으르렁대던 여야가 임기를 대통령에 맞추는 법 제정을 할 모양이다. 그러나 연구기관장도 포함해야 하는 건지는 의문이다. 국책 연구기관들은 이명박정부 이후 잃어버렸던 시력(視力)을 회복시켜 장기 미래 비전을 연구토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정 운영 코드를 내세워 자리다툼으로 국력을 낭비하는 폐단을 막아야 한다. 공공기관 개혁 차원에서 국책 연구기관의 민영화도 방법이다. 예컨대 민주당계 브루킹스 연구소와 공화당계 헤리티지 재단으로 양분돼 집권 정당 성향에 맞게 인맥을 교류하는 미국식 시스템도 들여다보기 바란다. 제왕적 대통령의 권위를 없앤다면서 머리맡에 책사를 두려는 것은 개발독재 시대 발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책 기관이 아닌 삼성경제연구소 자료를 대거 수용해 핵심 어젠다에 반영했다. 머리는 민간에서 빌려도 된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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