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여성의 불안은 이유가 있다

국민일보

[한승주 칼럼] 여성의 불안은 이유가 있다

입력 2022-07-27 04:20

대학에서 발생한 사망사건 성폭행에 불법촬영까지 참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은 안전하지 않아
코로나 스트레스도 감형사유… 성범죄에 유독 관대한 판결
대법원 양형기준 강화 계기로 엄중한 처벌 이뤄져야 한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겨우 스무 살,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중 계절학기 시험을 마친 날 밤이었다. 동급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건물 3층에서 추락해 숨졌다.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추락 후 1시간 넘게 방치됐다가 행인에게 발견됐다. 당시에도 가늘게나마 숨이 붙어있었다. 추락 직후 동급생이 현장을 도망치지 않고 바로 119에 신고했더라면 살릴 수 있는 생명이었다. 고단했던 고3을 지나 이제야 좀 대학 생활의 재미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낭만을 만끽해야 할 캠퍼스에서 그는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저버린 스무 살의 죽음 앞에서 어른으로서,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참담한 심정이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가 한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의 총집합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아프다. 가해 학생은 성범죄를 저질렀고,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성폭행을 전후로 불법 촬영을 시도했으며, 피해자가 추락한 후 구조하기는커녕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언론은 그의 죽음을 선정적인 수식어로 보도했고, 그의 죽음에는 애도 못지 않게 악성 댓글이 적지 않았다. 피해자의 외모를 궁금해하고 신상을 터는 2차 가해까지 일어났다. 강간, 치사, 불법 촬영, 악성 댓글, 2차 가해라는 총체적인 폭력이다. 비정상적인 가해자의 돌발행동인데 왜 여성 전체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해 남녀를 갈라치기 하느냐는 얘기마저 나온다. 과연 그럴까. 그가 남학생이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여전히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억한다. 서울 강남 번화가 주점의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범인은 먼저 온 남자 몇 명을 보내고 여성이 들어오자 흉기를 휘둘렀다. 희생자는 겨우 스물세 살이었다. ‘여자라서 죽었다’ ‘내가 그 시간에 거기 없어서 우연히 살아남았다’ 강남역에 모여 추모하던 여성들이 이렇게 외친 이유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지만 여성의 안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도 깜깜한 밤 골목길을 여자 혼자 걷기 두렵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게 알려질까 무섭다. 한밤중 택시를 혼자 타는 것조차 때론 불안하다. 데이트 폭력, 스토킹 등으로 인한 살인사건에서 자유롭지 않다. 실재적 위협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가 세계 살인범죄를 분석한 2019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여성 피해자 비율이 남성보다 높은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여성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에 엄중한 처벌을 해야 한다. 성범죄를 저질렀다가는 직업도 명예도 잃고 사실상 인생이 끝날 수 있다는 인식이 사회에 뿌리내려야 한다. 성범죄에 대한 감형 사유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합의, 반성문, 기부, 봉사, 장기기증 서약, 혼인, 고령 등 참작 이유도 다양하다. 특히 피해자와의 합의는 가장 큰 감형 요소인데 합의에 이르지 않고 시도만 하더라도 참작이 된다. 때문에 합의를 종용하며 피해자를 괴롭히는 2차 가해가 벌어지기도 한다.

‘악어의 눈물’ 같은 반성문은 온라인에서 불과 몇천원에 구할 수 있다. 오늘도 성범죄자들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신 판사에게 반성문을 쓴다. 장기 기증 서약을 했다가 감형을 받은 후 철회하는 일도 있다. 최근 여성의 신체를 불법 촬영한 공무원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격무로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는 이유가 참작됐다. 여성을 강제추행한 군인은 대학에 합격해 기분 좋은 상태에서 술을 마시다 보니 벌어진 일이라는 게 참작돼 감형됐다. 참으로 허탈하고 황당한 일이다. 그러니 판사들이 성범죄를 양산한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오죽하면 온라인에 성범죄 전문 감형 팁을 전수하는 일타강사까지 등장했을까. 성범죄 ‘꼼수 감형’은 피해 여성을 한 번 더 가해하는 일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최근 성범죄 수정 양형기준을 의결해 오는 10월부터 적용하기로 했다. 앞으로는 합의와 무관하게 2차 가해를 했다면 가중처벌하고, ‘고령’은 집행유예 참작 이유에서 삭제한다.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주거침입을 동반한 강간 등에 대한 권고 형량이 최대 징역 15년으로 높아진다. 솜방망이 판결에 대한 비판이 많았는데 이제라도 좀 달라질지 지켜볼 일이다. 여성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사회에서 발생한 스무 살 대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건의 조속한 진상 규명을 기다린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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