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벼랑 끝 사회의 징후

국민일보

[창] 벼랑 끝 사회의 징후

이가현 온라인뉴스부 기자

입력 2022-08-06 04:02

“다음 생애에는 좋은 부모를 만나거라.” 지난 6월 중증 발달장애가 있는 20대 딸을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50대 어머니 A씨가 쓴 유서의 일부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뒤 장애가 있는 딸을 혼자 키우며 생활고에 시달렸고, 우울증을 앓다 갑상샘 말기암 판정을 받자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딸은 살해됐지만 자살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녀는 법정에서 “제 딸과 같이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제가 살아 이 법정 안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흐느꼈다. 법원은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역시 생활고에 시달리다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들을 목 졸라 살해한 뒤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40대 여성 B씨에게 법원은 지난달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장은 “피고인이 설령 자유의 몸이 된다 하더라도 ‘내 손으로 자식을 죽이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것입니다. 평생 형을 살게 되는 무겁고 고통스러운 벌입니다”라고 꾸짖었다.

얼마 전 벌어진 자녀 살해 후 자살미수 사건들이다. 과거에는 이런 사건들에서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의사결정권이 없는 어린 자녀가 부모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생명을 박탈당하는 것은 자살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최근 들어 이러한 사건들을 언급할 땐 자녀 살해 후 극단적 선택 또는 극단적 선택 시도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 사회가 이런 종류의 사건들을 말할 때 표현의 명확성을 따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언급할 일이 많아졌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똑 떨어지는 통계는 없지만 생활고 등에 시달리다 자녀를 살해하고 본인도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했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사건들이 꽤 많아졌다.

어린 자녀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넘어 그 전에 자녀를 살해하는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도 비슷한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체감이 될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징후처럼 느껴진다. 우리 사회가 벼랑 끝, 아니 ‘초’벼랑 끝 사회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섬뜩함마저 든다.

지난 2019년 국민일보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주제로 심층취재를 진행한 바 있다. 수사 자료, 판결문, 언론 보도, 일선 현장의 목소리 등을 청취했다. 우선 자녀 살해 후 자살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높은 비율로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 중 하나로 독립적 인격체인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한국의 잘못된 인식을 꼽았다. 여기에 팬데믹이라는 변수가 더해졌다. 코로나 팬데믹의 장기화로 생활고가 늘고, 돌봄 스트레스까지 가중되면서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병리적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특히 취약함을 드러낸 계층은 장애인 자녀를 둔 가족들이었다. 중증 장애를 앓는 자녀를 양육하다 신변을 비관해 자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은 최근 몇 년 새 특히 자주 일어났다. 비극이 잇달아 일어나자 장애인단체는 국가적 돌봄 체계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이 세상에 남아봤자 고통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 그 생각을 바탕으로 본인의 손으로 자식을 죽이는 선택을 끊을 수 있는 건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벼랑 끝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래도 어디선가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극단적 선택을 조금 늦출 수 있다. 그게 바로 사회 안전망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도 살아있는 게 낫다’는 생각하게끔 만드는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 말이다.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급속도로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듯하다.

자녀를 살해한 A씨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다. 연민과 동정의 영역에서 이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중증 장애를 앓고 있는 자녀를 혼자 양육하고,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으며, 우울증에 말기암 판정까지 받은 상황이라면 모든 책임을 A씨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벼랑 끝에 몰아넣고 왜 떨어졌냐고 묻고만 있는 꼴이 아닌가. 모든 삶의 무게는 동일하지 않다. 가끔 삶의 무게는 인간의 힘으로 버티기 힘든 수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무게를 지탱해줄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게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벼랑 끝 사회의 섬뜩한 징후는 언제 잦아들까. 영화보다 더 잔인한 현실을 매일 마주하지 않는 나라를 보고 싶다.


이가현 온라인뉴스부 기자 hyu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