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정치 8단’ 박지원

국민일보

[한마당] ‘정치 8단’ 박지원

이동훈 논설위원

입력 2022-08-05 04:10

동양권에서 숫자 9는 최고의 수 또는 완결을 뜻한다. 구척장신, 구중궁궐, 구사일생에서처럼 무언가를 과장할 때 많이 등장한다. 바둑 등급이 9단까지밖에 없는 것도 9가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뜻하는 데서 비롯됐다. 중국인들은 숫자 9가 ‘오랠 구(久)’와 중국어 발음(지우)이 같아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휴대전화, 자동차 번호판 등에 즐겨 쓴다. 반면 유통 분야에서 고객을 끌기 위해 29.99 달러처럼 상품 가격에 주로 쓰는 걸 보면 9가 불완전의 의미로도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주역을 보면 9는 고정되지 않아 변화하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융통성을 지닌 수로 통한다. 서구에서도 끝은 물론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신화에 자주 등장한다.

현대 한국 정치에서 바둑 9단을 빗대 ‘정치 9단’이란 용어가 한창 유행한 적이 있다. 1979년 10·26사태로 시작된 ‘서울의 봄’ 이후 수십 년 정계를 풍미한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등 3김씨가 생전에 정치 9단으로 통했다. 3김이 없는 지금은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까? 직업이 여야 비상대책위원장인 김종인 전 의원과 뉴욕 한인회장 시절 DJ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진출해 산전수전 다 겪은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정도일 듯싶다. 그런데 자신을 정치 9단으로 즐겨 불러온 박 전 원장이 4일 이 무형의 ‘정치 단증’을 걸고 내기에 나섰다. 그는 이날 아침 라디오에 출연해 윤석열 대통령이 여름휴가(1~5일)와 겹쳐 방한 중인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과의 면담이 없을 거라는 대통령실 발표를 반박하며 “만약 (두 분이) 안 만나면 정치 9단을 내놓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이 예측은 불과 몇 시간 뒤 대통령실이 두 사람이 전화 통화하기로 했다고 재반박하면서 오답이 됐다. 그동안 탄탄한 정보력을 자랑해온 박 전 원장이지만 미래 예측에선 불발에 그친 셈이다. 내기는 내기인 만큼 박 전 원장이 정치 몇 단으로 내려올지 궁금하다. 두 사람이 전화통화라도 했으니 8단쯤? 아니면 주역의 뜻처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계 은퇴?

이동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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