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칩4 동맹에서 乙이 되면 안 된다

국민일보

[이동훈 칼럼] 칩4 동맹에서 乙이 되면 안 된다

입력 2022-08-10 04:20

한·미동맹 본격 복원 시점에 미국은 어려운 칩4 가입 요구
미국의 새 반도체 지원 법안에 동맹국조차 불리한 조항 담겨
예비회의 참석키로 한 정부 당당하게 국익 우선 모색해야

내년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이다. 1953년 체결한 조약엔 북한의 침략과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해 방위에 협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6·25전쟁 참전 미군의 숭고한 희생으로 싹튼 한·미동맹도 이때부터 틀이 갖춰졌다. 사람으로 치면 벌써 고희(古稀)를 앞두고 있으니 우리 국민 뇌리에도 한·미동맹이란 말이 고유명사로 느껴질 만큼 익숙해졌다. 한국은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 맹주 미국이 원조한 나라 중 가장 빠른 성장과 모범적인 민주사회를 이뤘기에 한·미동맹이 거론될 때면 항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가 수식어로 동반된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 원조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미국이 북한 핵의 위협을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 국민의 아킬레스건을 의식한 건지는 몰라도 끊임없이 한국의 군사동맹에 대한 진정성을 테스트한다며 달콤한 갑의 지위를 누려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가 거듭됨에도 미국은 자국이 씌워주는 안보 우산이면 충분하다며 한국이 개발하는 로켓의 사거리를 제한해 왔다. 대신 한국에 미국산 첨단 무기를 팔아 군사원조에 대한 반대급부를 챙겼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이 증액해 지불한 주한미군 주둔비를 멕시코 장벽을 쌓는데 전용하는 등 한국민의 혈세를 한·미동맹을 폄하하고 희화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주한미군사령부가 떠나고 없는 용산에 둥지를 튼 윤석열정부는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문재인정부의 전략적 모호성 때문에 느슨해졌던 한·미동맹을 새롭게 복원하려 하고 있다. 이에 미국은 사드 배치 요구보다도 더 까다로운 시험문제를 내밀었다. ‘칩4’ 가입 요구가 그것인데 경제 분야인 칩4에 ‘협정’도 아닌 ‘동맹’이란 무시무시한 용어가 따라 붙은 점이 예사롭지 않다. 국내 언론과 윤석열정부는 중국의 보복을 의식해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라고 에둘러 표현하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와 미 언론은 ‘반도체 동맹’을 고집한다. 모 아니면 도의 선택지밖에 없다는 뜻이다.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경제 협정과 달리 동맹은 반드시 주적이 있음을 의미하며 적의 궤멸이 목적이란 점에서 호전적이다. 미국이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반세계화, 반중국화의 수단 중 하나로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우방 간 공급망 구축)’ 전략을 끄집어내 경제안보 프레임을 만든 것도 그 이유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민주주의 가치와 프렌드 쇼어링 전략에 기반한 칩4 동맹이 중세 십자군 전쟁 속에 꽃피운 자유무역 도시 연맹 ‘한자동맹’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친구나 무리라는 뜻의 독일어 ‘한자’는 ‘프렌드 쇼어링’의 프렌드와 비슷한 개념이다. 동맹이란 말까지 붙은 것과 공멸시켜야 할 주적이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한자동맹의 주적이 자유무역을 방해하는 발트해 해적이라면 칩4 동맹의 주적은 미국의 첨단 반도체 기술을 탈취해 안보까지 위협해 온 중국이다.

하지만 16개국 187개 도시에서 번성한 한자동맹의 자유무역 원칙도 탐욕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력이 막강해지자 외국인 선주의 영업을 금지하고 한자동맹의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만을 회원으로 받는 규제를 도입했다. 미국이 펼친 우산 아래 있는 프렌드들도 행동이 자유롭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미 의회가 최근 통과시킨 ‘반도체 칩과 과학 법’은 투자세액공제 25%라는 당근의 달달함 못지않게 동맹국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는 채찍이 담겼다. 동맹국들이 중국에 향후 10년 동안 새로운 반도체 투자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조항은 한자동맹 종말을 재촉한 폐쇄성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반독점과 자유무역을 기치로 한 세계무역기구(WTO)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더 우려스러운 건 나는 절대 선이고 저쪽은 절대 악이라는 이분법이다. 이는 타협의 여지를 원천봉쇄한다. 알카에다를 상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이론과 다를 게 없다. 윤석열정부는 고심 끝에 칩4 예비회의에 참석해 가입 여부를 탐색한다고 한다. 미국이 불러주는 대로 답안지를 써 내려갈 게 아니라 시험문제 출제 의도를 떳떳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딱 하나만 명심하면 된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 주 무대인 아프가니스탄을 결국 20년 만에 버린 결과 그 피해는 오롯이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몫이 됐음을.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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