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제2 n번방’ 주범, 도피 중에도 여자인 척 속여 성착취

국민일보

[단독] ‘제2 n번방’ 주범, 도피 중에도 여자인 척 속여 성착취

“신상 유포 글 봤다” 메시지 보내
대화방 조작 영상·사진 전송 유도
경찰 “미성년 6명 피해… 추적 계속”

입력 2022-09-01 04:08 수정 2022-09-01 04:08
피해자를 속이기 위해 조작한 ‘가짜 박제방’(왼쪽)과 ‘최은아’라는 이름으로 여성 흉내를 내며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제2 n번방’ 주범 엘의 대화. 텔레그램 캡처

경찰이 추적 중인 ‘제2의 n번방’ 사건 주범인 ‘엘’(가칭)이 피해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최은아’라는 가명을 사용해 여자인 척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자 압박을 위해 ‘가짜 박제방’이 있는 것처럼 대화 내용을 조작하기도 했다.

31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5월 10대 A양은 자신을 최은아라고 소개한 이로부터 “텔레그램에서 당신의 사진을 유포하고 신상을 ‘박제’할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보고 급히 알려드려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온라인에서 박제란 특정인의 신상정보나 성착취물 등을 공개한 뒤 지우지 않고 남겨둔다는 의미로 쓰인다.

소셜미디어에 재미 삼아 자신의 모습을 촬영해 올린 뒤에 날아온 메시지였다. A양은 영문도 모르는 채 ‘신상이 유포됐다’는 말에 겁 먹고 “유포하지 말아 달라”며 애원했고, 상대는 “도와주기 위해 연락한 것이다. 내가 영상을 왜 유포하냐”며 안심시켰다.

그를 신뢰하게 된 A양이 박제방에서 오간 대화 내용을 묻자 그는 대화 캡처본 사진을 보냈다. 거기에는 대화방에 참여한 3명이 A양 실명을 거론하며 ‘신상도 같이 박제할 거임?’ ‘박제하려고 하는데 애들 좀 모아줄래?’ 따위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메시지를 보낸 최은아란 인물이 엘 본인이고, 해당 캡처본은 그가 조작한 대화방으로 보고 있다. 경찰 모니터링 결과 해당 시점에 A양 신상정보 등이 유출된 정황도 없었다고 한다. 엘이 A양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성으로 위장해 접근한 뒤 ‘가짜 박제방’을 만들어 속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A양은 “범인을 잡으려면 멈추지 말고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영상을 계속 보내 안심시켜야 한다”는 그의 안내에 따라 성착취물을 스스로 촬영해 전송한 것으로 전해졌다. 엘은 성착취물을 해킹해 모두 지워주겠다며 계속해 A양을 속였다.

엘이 ‘최은아’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하고 있다. 텔레그램 캡처

현재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n번방 사건’과 유사한 성착취 범죄를 벌인 엘을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추적 중이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만 6명인데, 모두 미성년자다. 확인된 피해 사진과 영상은 350개로 알려졌다.

엘이 주도한 성착취 방식은 피해자 몸에 ‘주인님’이라는 글씨를 새기도록 강요하거나 해외에 서버를 둔 텔레그램을 유통 루트로 삼는 등 n번방과 범행 수법이 비슷하다. 하지만 성착취물 제작과 유통 방식은 변화했다. 이전에는 주무대가 되는 대화방이 있었지만 엘은 특정 대화방에 자리잡지 않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흔적을 최소화했다.

엘이 활동을 시작한 건 2020년 중반쯤이다. 앞서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 n번방을 운영한 문형욱이 구속될 무렵이다. 엘은 “난 절대 잡히지 않는다”며 대범하게 범행을 이어갔다. 특히 앞서 n번방 사건을 쫓았던 ‘추적단 불꽃’을 사칭해 “신상이 유포됐는데 도와주겠다”며 피해자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그러던 엘은 A양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 직후인 지난 5월쯤 돌연 자취를 감췄다. 문제의 대화방에 있던 한 관전자가 그의 존재를 언론에 알리면서 정체가 탄로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20년 3월 국민일보와 함께 ‘n번방 추적기’ 시리즈를 보도한 ‘추적단 불꽃’ 일원이자 ‘미디어플랫폼 alookso(얼룩소)’ 소속인 원은지 에디터는 “n번방 사건 주범들이 구속되고, 법 개정도 됐지만 ‘이 정도면 됐겠지’ 하는 안일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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