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IRA, 진짜 전쟁입니다!

국민일보

[이동훈 칼럼] IRA, 진짜 전쟁입니다!

입력 2022-09-07 04:20

동서 막론 제국의 대리전쟁과
통치 이념의 피해는 백성들 몫

美 인플레 감축법은 일자리와
한국경제 전반에 타격 불가피

윤 대통령, 가치외교 재점검해
근본적 산업 정책 모색해야

창덕궁 후원 가장 후미진 곳에 대보단이라는 조선왕실의 제단 터가 있다. 지금은 옆에 600살가량의 천연기념물 251호 다래나무만 남아 있어 일반인은 알아보기 힘들다. 대보단은 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을 제사 지내던 곳으로 1704년 숙종이 임진왜란 당시 군대를 보내 왜적을 물리쳐준 신종의 은혜를 기린다며 건립했다. 낮에는 청나라에 예를 갖추고 밤에 몰래 제를 지냈다고 한다.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을 빌미로 명의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고착시킨 상징물인 셈이다. 역사 속에서 사라진 명을 200년이나 떠받든 왕실의 소중화(小中華)와 사대주의 행태는 사색당파와 세도정치 득세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망국을 재촉했을 것이다. 이렇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국들이 약소국에서 벌인 대리전쟁은 영토경영을 위한 주요 수단이었고 거기엔 항상 통치 이념이 따라 다녔다. 물론 그 피해는 백성의 몫이었다.

300만명 이상 사망한 6·25전쟁도 다르지 않다.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치러진 전쟁 이후 남한의 군사정권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켰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임진왜란과 명의 성리학이 각각 6·25전쟁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로 대체된 거로 봐도 억지는 아닐 듯싶다.

6개월을 끌어온 우크라이나 전쟁도 미국엔 신냉전 구도로 국제 정세를 이끌어가는 계기로 작용하는 듯하다. 슈퍼파워 지위를 넘보는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동맹국 규합에 나선 걸 보면 정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지난달 초 의회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기습 통과시키기 전 ‘자유민주주의’ 기치를 들고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순방에 나선 걸 반추해 보자. 그 행보에서 ‘제국의 경영 전략’이 묻어나지 않는가?

IRA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의 4배인 3690억 달러를 투입, 전 세계 기업들로부터 1조 달러를 유치해 미래 산업인 그린산업을 미국 주도로 재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20여 년간 주도해 온 가치사슬체계(GVC)를 무너뜨리는 데 방점이 찍혔다. 관세 인상 등을 통한 ‘리쇼어링’(기업이 해외로 진출했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책이었다면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아예 중국을 아웃시키는 ‘디커플링’을 추구한다. 계획대로 된다면 예컨대 2030년쯤 전기차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배터리 등 관련 부품들의 북미 생산 비중이 80~100%가 돼야 한다. 현대차의 전기차 공장은 물론 반도체, 배터리 업체들은 모두 짐을 싸서 미국으로 떠나야 할 판이다. 바이든은 최근 마이크론 도요타 혼다 등이 새로운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며 이들 기업이 양질의 미국 노동자들 덕분에 투자한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농담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한국의 자동차와 반도체 산업만 해도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나 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노동시장 및 산업 공동화로 생길 혼란은 상상 그 이상이다. 우리 기업이 IRA 정책 수혜를 위해서는 중국 의존도가 70~80%인 중간재 수입을 단기간에 줄여야 하는데 불가능에 가깝다. 이로 인해 원화 가치의 약세는 불을 보듯 뻔하다. IRA가 말로만 인플레이션 감축법이지 중국 견제하려다 동맹국만 잡는 건 아닌지 우려가 속출하는 이유다.

최근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한국 자동차 업체에 대한 미국의 전기차 차별과 관련해 미국 언론에 “미국이 등에 칼을 꽂았다”며 동맹국으로서 서운함을 표현했지만, 전기차는 극히 일부분에 해당할 뿐이다. 미국 정부와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미국을 오가는 우리 정부는 협상 목적을 전기차 보조금 관련 차별 대우 시정에만 국한했다면 지금이라도 활동 반경을 넓힐 필요가 있다. 특히 ‘가치외교’를 내세운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이 제시한 ‘자유민주주의’ 기치의 성격을 제대로 분석해 IRA로 인한 국내 산업재편 방향 모색 등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필요하면 이번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바이든을 만나 담판도 불사하고 유럽연합, 독일 영국 등과도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같은 사람을 사면까지 시켜가며 부산 엑스포 유치 심부름을 보낸 건 이해할 수 없다. 언제까지 88올림픽, 평창 동계올림픽처럼 보여주기식 국제행사 유치에 재벌들의 시간을 빼앗을 건가. 지금은 미국이 선포한 ‘IRA 전쟁’ 대비책이 더 시급해 보인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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