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미스터 할리의 어린 왕자

국민일보

[오후 3시의 헌책방] 미스터 할리의 어린 왕자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입력 2022-09-17 04:03

헌책방에서 일하며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세상엔 별별 사람이 다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사람도 각각의 책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복잡한 이야기를 품고 살아간다. 헌책방에 들고나는 손님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손님은 워낙 특이해서 금방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 특별하다기보다 특이한 손님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미스터 할리’라고 부르는 그 사람처럼.

미스터 할리가 책방에 오는 건 대략 1분 전에 미리 알 수 있다. 내가 예지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미스터 할리는 늘 커다란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 우렁찬 중저음의 배기음 소리가 창문을 흔들면 손님이 도착했다는 신호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를 미스터 할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가 처음 우리 헌책방에 왔던 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몸에 달라붙는 가죽바지와 세트로 맞춰 입은 웨스턴 디자인 가죽점퍼, 선글라스, 굵은 반지, 그리고 치렁치렁 흘러내린 은색 체인 액세서리…. 나는 하마터면 그에게 이 주변에서 영화 촬영이라도 하느냐고 물을 뻔했다. 헬멧을 벗자 그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성이었다. 아무리 봐도 헌책방 손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빌려 쓰려고 들어온 것일까? 하지만 그의 첫마디는 더욱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어린 왕자 책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런 터프한 상남자가 ‘어린 왕자’를?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이 아니고? 어쨌든 나는 그 책을 꺼내서 줬고 그는 묵묵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미스터 할리는 이후로도 우렁찬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가끔 책방에 들렀다. 그런데 올 때마다 찾는 책이 늘 비슷했다. ‘어린 왕자’ 다음은 ‘피터 팬’이었고 ‘톰 소여의 모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솝 이야기’ 등등으로 이어졌다. 어떤 손님이 무슨 책을 사건 책방 주인이 굳이 사정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미스터 할리가 왜 이런 책만 사는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우리 헌책방에서 가져간 책은 다름이 아니라 손녀딸이 읽고 싶다고 해서 부탁받은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미스터 할리는 체인이 달린 가죽 지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안에 들어있는 사진을 내게 보여줬다. 힘없는 표정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작은 여자아이였다. 미스터 할리는 손녀에게 읽어줄 동화책을 사러 우리 가게에 들른 거였다. 그는 손녀가 자신의 영원한 어린 왕자라고 하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처음에 그가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전혀 그런 쪽과는 관계가 없다는 걸 알고 미안했다. 오히려 그는 늘 상냥하고 매우 신사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어떤 책은 마지막 장까지 읽어보지 않고는 진면목을 다 알 수 없기도 하다.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려운 책을 끈기를 가지고 읽어나가듯 사람 대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나는 헌책방에서 책과 사람을 만나며 매일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