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생명의 줄에 사랑의 끈이 이어졌다

국민일보

끊어진 생명의 줄에 사랑의 끈이 이어졌다

양산 ‘밧줄 절단 사건’ 그 후 5년… 희생 가장의 남은 가족을 만나다

입력 2022-09-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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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아파트 밧줄 참사’ 유족들이 21일 부산 부산진구 자택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남편을 떠나보내야 했던 아내와 5남매 가운데 넷째인 김민서양, 사위를 잃은 권상우씨, 사건 당시 생후 27개월이었던 막내딸 민아양(왼쪽부터). 부산=신석현 포토그래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오늘도 줄 타는 거 조심하게나.”

2017년 6월 8일 오전 6시40분쯤이었다. 사위와 장인은 언제나 그랬듯 살뜰한 마음이 담긴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1시간30분이 흐른 아침 8시10분쯤 황망한 전화가 걸려왔다. 사위가 경남 양산의 한 아파트에서 밧줄에 의지해 실리콘으로 외벽 홈을 메우다가 13층 높이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이었다. 경찰 조사에서 드러난 사건 경위는 충격적이었다. 사위는 두려움을 잊으려고 휴대전화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며 작업을 했다. 그런데 이 소리가 크다고 항의하던 주민이 옥상에 올라가 공업용 커터칼로 밧줄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사위에겐 생후 27개월부터 고교 2학년생까지 자녀가 5명이나 있었다. A씨가 끊어버린 밧줄은 이들 가족의 생명줄이었던 셈이다.

5년여가 흐른 지금, 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21일 이 가족이 사는 부산의 한 아파트를 찾았을 때 장인 권상우(70)씨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픈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쉽지가 않네요. 지금도 3주에 한 번씩 가족들과 함께 사위의 납골함이 있는 경남 김해의 추모공원에 갑니다. 손주들은 매주 가자는데 쉽지가 않네요.”

밧줄이 끊어진 자리에 나타난 사랑의 끈

권씨의 설명에 따르면 손주들은 갑자기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흥건한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첫째 아이가 받은 상처가 너무나 컸다. 무시로 극심한 가슴 통증을 호소했고 자다가 벌떡 일어날 때도 많았다. 지금도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는 매주 한 차례씩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 권씨는 “한창 예민하던 시기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린 탓에 충격이 컸던 것 같다. 요즘도 첫째 손주가 있는 자리에선 그 누구도 사위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권씨가 추억하는 사위는 매사에 반듯하고 끔찍할 정도로 가족을 아끼던 가장이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이 아닌데도 장인과 장모에게 자주 용돈을 챙겨주던 착한 사람이었다.

인터뷰 자리엔 아이들의 엄마인 권씨의 딸도 동석했는데, 그는 남편을 “항상 자상했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용실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손님으로 온 남편을 처음 만났어요. 6년간 연애를 한 뒤 결혼식을 올렸죠. 저에게 남편은 첫사랑이었습니다. 항상 재밌고 저만 사랑해주던 그런 사람이었어요.”

사건이 언론에 크게 소개되면서 남겨진 가족에겐 온정의 손길이 이어졌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가 성금 모금에 나섰으며 방송인 유재석씨를 비롯한 유명인들도 위로금을 내놓았다. 특히 힘이 돼준 곳은 경기도 성남 만나교회(김병삼 목사)였다. 이 교회가 가족들을 위해 이어온 끈질긴 나눔의 사역은 가족의 앞날을 밝혀준 횃불과도 같았다.

만나교회 성도들은 사건 직후 주일 예배를 통해 이렇게 뜻을 모았다. 아이들이 각각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회가 1인당 50만원씩, 매달 이 가족을 지원해보자고. ‘단기 후원’을 포함해 270명 넘는 성도가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현재도 이 운동에 참여하는 성도는 150명에 달한다.

첫째와 둘째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현재는 남겨진 자녀 가운데 3명만 돕고 있지만 사건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유족을 후원하는 곳은 만나교회가 유일하다. 김병삼 목사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일회성 후원 관행에서 벗어나 안타까운 일을 겪은 가정을 꾸준하게 돕는 일을 벌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위가 세상을 떠난 뒤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떠맡게 된 권씨의 모습. 부산=신석현 포토그래퍼

“부산에 내려가 아이들을 직접 만나본 적도 있어요.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꿈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서였죠. 한국교회가 나눔을 실천하는 다양한 일을 벌이지만 누군가를 끝까지 돕는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양산 사건을 통해 교회가 한 가정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례를 남기고 싶었어요.”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의 뜻 전하고 싶어”

권씨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사위도 생전에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만나교회의 지속적인 후원은 권씨가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크게 바꿔놓았다. 권씨는 부산의 부전시장에서 작은 과일가게를 운영하며 딸과 손주들을 건사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나는 내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살았던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 있으면 경제적 도움을 호소하는 지체장애인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과거엔 안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그들에게 1000원짜리 한 장이라도 쥐여주게 되더군요. 저희 집안이 도움을 받았으니 저 역시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만나교회에서 성도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으면 합니다. 교회에서 저를 불러준다면 성도들 앞에서 감사의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권씨의 딸도 만나교회 성도들에게 거듭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그는 “만나교회의 후원이 큰 보탬이 됐다. 그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 늘 감사하다는 생각만 든다”며 미소를 지었다.

아파트에는 권씨와 그의 아내, 딸과 그의 자녀 5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사건 당시 생후 27개월이던 막둥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자녀 가운데 첫째와 둘째가 대학생이 되면서 등록금 부담 탓에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됐지만 이들 가족은 지금껏 그랬듯 꿋꿋하게 삶의 무게를 감당해나갈 것처럼 보였다. 김해에 있는 추모공원 납골함에 담긴 둘째 아이의 편지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아빠 우리 독수리 오남매 땜에 고생 많이 하셨을 거야. 아빠, 우리 독수리 오남매랑 엄마를 위해 고생 많이 해줘서 고마워. 아빠 얼굴, 목소리 꼭 기억할게. 아 그리고 아빠. 내가 팔 못 주물러주고 아빠 보내서 정말 미안해. 아빠. 사랑해요. 자주 보러 갈게. 진짜 많이 사랑해요.”

부산=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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