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있다

국민일보

[특별기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있다

김잔디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

입력 2022-09-27 04:05

한국 속담 가운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노력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점은 한국인의 대표적 특성이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현대사에서 이 특성은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온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반면 ‘나무’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열 번 찍는 것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상황에 따라서는 목표 달성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4일 밤 20대 후반 여성인 역무원 A씨가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 화장실을 순찰하던 도중 30대 초반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A씨는 비상벨을 눌러 도움을 요청했고, 역사 직원과 현장 부근에 있던 이들이 범인을 제압해 경찰에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씨는 결국 숨을 거뒀다.

수사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란 사실이 밝혀졌다. 가해자가 2019년부터 피해자를 협박했고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스토킹을 한 것이 확인됐다. 피해자는 지난해 10월과 올해 2월 두 차례에 걸쳐 가해자를 고소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법원은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스토킹처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스토킹 행위에는 접근하기, 기다리기, 전화하기, 주거에 물건 두기 등이 포함돼 있다. 그 가운데 상대방에게 다가가고 기다리는 것,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꽃을 선물로 보내는 것 등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이뤄지는 행위다 보니 이를 모두 불법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선물을 보내는 것은 경우에 따라 상대방이 감사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스토킹 범죄와 일반 범죄의 큰 차이점이자 스토킹처벌법 제정의 걸림돌이 됐던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을 때리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는 행위 등은 그 자체로 가벌성이 인정될 정도로 불법성을 지니고 있지만 스토킹 범죄를 구성하는 각 행위는 그렇지 않다.

이번 사건에서는 스토킹 행위가 시간 경과와 함께 중대한 범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행위자는 일정한 목적이나 감정을 충족하기 위해 스토킹을 한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경우 행위가 반복될 수 있으며 점차 과격해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켜보는 것에 그치다가 자신을 알리기 위해 진로를 막아서거나 옷깃을 잡을 수도 있다. 상대방이 응해주지 않을 경우 더 심한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이런 스토킹의 특성을 고려하면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비극이었다.

20년 이상의 노력을 통해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됐고 다음 달이면 시행 1년을 맞이한다. 스토킹을 경범죄처벌법상 지속적 괴롭힘으로 치부해 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태료로 규율하던 때와 비교하면 징역형까지 규정한 것은 분명히 눈부신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스토킹처벌법이 스토킹 범죄에 대한 효율적 대책 및 피해자 보호에 기여하고 건강한 사회질서 확립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실무 및 학계에서는 까다로운 스토킹 범죄 성립 요건, 긴급 응급조치 위반·불이행에 대한 가벼운 처벌, 스토킹 범죄에 대한 반의사불벌죄 규정 등이 스토킹처벌법의 허점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도 있다. 스토킹처벌법이 제정·시행된 이상 나무가 원치 않는데도 열 번 찍는 행위를 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다. 개별·구체적인 스토킹 행위는 외관상 경미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 잠재돼 있는 위험성을 간과하는 일이 다시는 있어선 안 될 것이다.

김잔디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