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준비된 미치광이, 푸틴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준비된 미치광이, 푸틴

입력 2022-09-30 04:20

오랫동안 축적한 전술핵무기
선제 핵공격 열어둔 핵 독트린
핵폭격 워게임 거듭한 軍훈련

우크라戰서 푸틴이 택한 길은
20년간 준비해온 과정과 일치

실제 핵무기 버튼을 누를 만큼
그는 정말 미쳤을지 모른다
그런데, 김정은이 그 행태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예비군 동원령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또 하나의 악수(惡手)를 뒀다고밖에 보기 어려웠다. 러시아 국민과 지도자 사이에는 암묵적인 계약관계가 형성돼 있다고들 한다. ‘우리(국민)를 못살게 굴지 않으면 네(지도자)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소련 시절부터 이어진 1당 독재와 푸틴의 20년 장기집권은 이런 계약 위에서 유지된 거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2차 대전 이후 처음인 동원령은 77년 만에 그 계약을 깨뜨린 행위였다.

‘네가 뭘 하든…’ 하면서 7개월간 묵묵히 푸틴의 전쟁을 지켜보던 러시아인들은 탈출행렬과 반전시위로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뻔히 예상된 저항을 무릅쓸 만큼 동원령이 전쟁에 도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예비군 30만명을 지금부터 훈련시켜 분수령일 겨울전투에서 전술적 효과를 거두기는 불가능하다. 그동안 드러난 러시아 군수품 실태를 보건대 먹이고 입히기도 힘겨울 것이다. 이 30만명은 총알받이가 될 수밖에 없다. 푸틴은 왜 총알받이가 필요했을까?

요즘 서방 언론은 푸틴의 속내를 넘겨짚느라 바쁜데, 어느 매체에서 이런 추측을 꺼냈다. “1968년 체코를 침공해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체코인들에게 ‘너희 땅은 우리가 병사들의 피로 산 것이다. 너희는 영토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고 했다. 푸틴도 우크라이나 땅을 러시아 병사들의 피로 적셔 그리 말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황당하게 들리는 이런 분석이 나올 만큼 푸틴의 행태는 광인의 것을 닮았다. 그런데 그에겐 핵이 있다.

푸틴이 브레즈네프의 영토관을 배웠을지는 몰라도 핵 독트린은 따라하지 않았다. 브레즈네프는 1982년 “적이 핵을 쓰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사용하는 일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재래식 군사력이 충분해 핵 없이도 국지전에서 이길 수 있었으니까. 소련 붕괴 후 뒤를 이은 러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경제가 함께 무너져 돈이 많이 드는 재래식 군대를 키울 수 없었다. 핵무기는 약자의 수단이다. 러시아군은 갈수록 핵에 의존하는 군대가 됐다.

러시아는 2000년 핵 독트린을 개정했는데, 핵사용 조건에 ‘핵공격을 받았을 때’와 함께 ‘재래식 무기로 공격받아 국가안보가 위태로울 때’를 추가했다. 선제 핵공격의 길을 열어둔 이 독트린을 만든 사람이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푸틴이다. 이후 대통령이 돼서 20년간 추진한 군 현대화는 곧 핵무기 현대화였다. 러시아군이 미국 무기로 무장한 우크라이나군에 쩔쩔매는 것은 현대화 투자가 핵무기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미국이 단거리·저강도 전술핵을 속속 폐기하는 동안(다른 좋은 무기가 많으니까) 푸틴은 거꾸로 대거 늘리고 킨잘(극초음속 공대지 미사일) 같은 탑재수단을 다양화했다. 장거리·고강도 전략핵과 달리 전술핵은 핵군축 협정에서 제외돼 맘껏 만들 수 있었다. 러시아 군사훈련의 워게임은 항상 핵폭격으로 마무리된다. 핵을 쓰지 않았다면 아직 제대로 싸운 것이 아니라 할 만큼 그들의 전술에서 핵은 필수전력이 됐다.

러시아는 세 개의 핵가방이 있다. 푸틴·국방장관·총참모장이 하나씩 가졌다. 셋 중 둘이 승인해야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발사된다. 전략핵은 이런 통제절차를 거치지만, 전술핵의 절차는 분명치 않다. 어디 있는지 알 뿐이다. 러시아에는 ‘오브젝트(Object) S’라 불리는 핵탄두저장고 12곳이 있는데, 버튼을 누르면 발사되는 전략핵과 달리 전술핵은 여기서 꺼내 와야 한다. 미국의 숱한 인공위성이 지금 뚫어져라 지켜보는 게 이 저장고 동향이다.

전술핵을 쌓아놓은 푸틴은 2020년 핵 지침을 다시 개정했다. 사용조건을 네 가지로 확대하면서 ‘국가 존립이 위협받을 때’란 표현을 담았다. 푸틴이 동원령 연설에서 사용한 바로 그 문구다. 침공부터 동원령까지 악수로 점철된 듯 보이는 푸틴의 행태가 섬뜩한 것은 이렇게 20년간의 행적과 들어맞기 때문이다. 전술핵을 확보하고, 핵사용 지침을 바꾸고, 병사들의 피로 명분을 갖춰 실제 버튼을 누르는 시나리오…. 그는 정말 핵을 쏠 만큼 미쳤을지도 모른다.

북한이 이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이달 초 전술핵 선제 사용을 아예 법제화했다. 내달로 예상되는 7차 핵실험은 전술핵 개발용일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은 지금 푸틴이 놓는 한 수 한 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만약 통한다면 따라하려 들 것이다. 푸틴의 미친 짓이 먹히도록 놔둘 수 없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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